주 제: 가치 있는 싸움
본 문: 디모데전서 1장 18-20절
설교자: 조 성 훈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이 살아가는 삶 자체가 싸움이고 전쟁이라고 합니다. 죽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싸워야 하기 때문에 공부도 전쟁, 취업도 전쟁, 교통도 전쟁입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싸움을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의 싸움과는 달리 그리스도인의 싸움은 선한 싸움, 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싸움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그리스도인들의 싸움은 방법과 목적, 결과가 옳은 싸움입니다.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경주”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히 12:1)”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전 9:24)” 그리스도인들의 경주가 어려운 것은 그것이 몇 시간, 며칠이면 끝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마음 가운데 전쟁이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 싸움은 평생 해 나가야 합니다. 이 경주를 마치면 세상이 끝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딤전 6:12)” 싸움이라는 것은 양쪽이 다 승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우지 않으면 내가 지게 됩니다. “가라사대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오기까지 장사하라 하니라(눅 19:12-13)” 이 말씀에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장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장사를 잘 하지 못 하면 본전도 까먹기 쉽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께서 주신 것들로 장사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장사를 잘 하기 위하여 지혜로워야 하고 신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 우리에게 주어진 싸움은 치열한 씨름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네게 주어진 싸움을 싸우라고 했습니다.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딤전 4:14)” 디모데에게 주어진 임무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경쟁은 사람들끼리 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들끼리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각자 주님 앞에서 내게 맡겨주신 코스를 달리는 것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길을 갈 수 없고 다른 사람도 내 길을 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임무와 사명이 있었고 디모데도 그러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하나님 앞에서 달려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할 일은 거짓 교사들과 싸우는 일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거짓교사들이 일어나고 있는데 조금만 정신 차리지 않으면 잘못된 교리에 빠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사회와 세상의 부도덕, 성적인 타락 등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은 마치 탄광촌에 살거나 연탄 장사를 하는데 옷은 흰 옷을 입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 사회가 급속도로 타락하고 있는데 그리스도인들이 신실하게 영적인 일에 몰두하는 것은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저는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던 그리스도인들이 잘못된 길로 빠지는 것을 종종 보았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장로도 이단에 빠지곤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로 단단하게 무장되어 있지 않으면 쉽게 잘못된 교리에 빠질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사단의 말에 빠진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고전 7:7)” 때로는 이 싸움이 참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욥기를 읽으면 그런 고통을 느낄 수 있습니다. “내가 왜 태어났던가” “어머니가 왜 나를 낳았던가”하는 고통의 말들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라고 표현했습니다. 성도들은 외적인 싸움과 내적인 싸움, 심지어는 성도들과도 싸운다고 합니다. 외적인 싸움은 부패되어가는 사회에서 거룩함을 지키려는 싸움이고, 내적인 싸움은 마음 속의 영과 육의 싸움입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불신자들은 잘못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은 있어도,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일, 하나님 말씀에 더욱 순종하지 못하여 괴로워하는 일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거스름돈을 500원을 더 받았다고 괴로워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몇 십만 원을 훔쳐도 전혀 괴롭지 않습니다. 양심이 마비된 사람은 믿음에 있어서 파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성숙하고 양심이 날카로울수록 적은 일에도 괴로워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지극히 정상적인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라
선한 싸움을 싸울 때는 순전한 믿음과 착한 양심이 필수적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주에 대한 확고한 신뢰가 없으면 선한 싸움을 싸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확고한 사람은 아무리 큰 어려움이 와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는데 풍랑을 만난 사도 바울은 “나는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신대로 하실 것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수없이 믿음에 대한 시련과 시험을 받는데 그 때 필요한 것이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입니다. 사업과 건강, 사람들의 오해를 받더라도 주님은 나를 아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싸움을 계속해서 싸울 수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11:1)” 예수님을 믿은 이후 오늘까지 지내온 삶을 생각하면 주님이 참 신실하셨다고 고백하게 됩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는 데 주님은 계시던 곳에 이틀이나 더 유하셨습니다. 사흘이 지나서 주님이 나타나셨을 때 아무도 주님을 신실하시다고 말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나를 믿어라, 신뢰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실패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은 승리가 보장된 싸움입니다. 오늘도 지고 내일도 질 수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승리가 보장되었습니다.
착한 양심을 가지라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착한 양심입니다. 양심은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과 선과 악의 판단을 내리는 도덕적 의식”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잘못을 하면 얼굴이 빨개지고 뉴스에 나오는 범죄자들은 얼굴을 가립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벧전 3:16)”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행 23:1)”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이 말씀은 사람과 하나님 앞에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힘쓴다는 말입니다.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딤전 3:9)” 깨끗한 양심을 가진 자가 장로를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순수한 신앙은 깨끗한 양심에 머물 수 있습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1:19)”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2)” 처음 한 두 번은 양심이 더럽혀지고 그 이후에는 양심이 말만 하려고 하면 밟아버립니다. 그러다보면 나중에는 양심이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됩니다. 화인 맞는다는 것은 불로 지져서 더 이상 감각이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작은 바늘로 찌를 지라도 아픔을 느끼는 것은 거기 신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뜨거운 물로 세수를 해도 뜨거운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과 같이 양심이 괴로운 상황에도 더 이상 괴로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양심이 더러워지고 무뎌져 나중에는 화인 맞아 감각이 없는 것입니다.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하려 함이니라(20)” 교회의 성도들을 훼방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이들을 사단에게 내어주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딤후 2:16-18)”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딤후 4:14-15)” 이들은 성도들에게 해를 끼친 사람들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론
여러분이 싸워야 할 고귀한 싸움이 있습니다. 독립군들은 국가 유공자라고 하는데 우리 역시 하늘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서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안락하게 사는 것은 포기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주위의 사람들, 거짓 교리, 세상의 부패와 늘 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기 위해서는 순수한 믿음과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해시계가 하늘의 빛을 바라지 않으면 시간을 알 수 없듯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양심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순수한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를 체험하고 그를 알게 될 때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달려갈 길, 싸워야 할 싸움을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한 양심의 날을 세우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접하며 주님에 대한 순수한 신뢰를 쌓아 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