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의 목적

2006년 September 3일 ()

본문: 고린도후서 1:8-14 |

주 제 : 고난의 목적

 

본 문 : 고후 1: 8~14

 

설교자 : 조 성 훈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를 인하여 많은 사람도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세상에서 특별히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거룩함과 진실함으로써 하되 육체의 지혜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행함은 우리 양심의 증거하는 바니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라 오직 너희가 읽고 아는 것 외에 우리가 다른 것을 쓰지 아니하노니 너희가 끝까지 알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말하는 것처럼 아시아에서 많은 고난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삶 또한 고난의 삶이었습니다. 가는 곳마다 배척 당하셨고, 사람들의 미움과 조롱, 저주를 받으시고, 결국에는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의 삶은 한 마디로 고난의 삶입니다. 이러한 삶을 사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면, 세상이 너희를 미워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상이 주님을 미워했기 때문에 주님을 따라가는 사람 또한 미워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모든 시대를 초월해서 언제나 사실로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르는 자에게 고난은 오게 되어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성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서신서를 보면, 그가 성도들에게 알리기를 원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었던 것을 볼 수 있는데, 첫째, 그는 로마서 1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가지 못한 이유(...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를 알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둘째로, 이방인들의 구원에 대해서 성도들이 알기 원한다고 말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이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롬 11:25)” 셋째, 구약의 교훈들을 알기 원한다고 말하면서, 구약의 많은 교훈들이 우리를 위하여 기록되었다고 말합니다.(고전 10:1-6) 또한 고전 12:1-3에서는 신령한 은사를 알기 원한다고 말하고 있고, 살전 4:13-14에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해 모르기를 원치 아니한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이 아시아에서 받은 고난

 

사도 바울이 서신서에서 말한, 성도들이 모르기를 원치 아니했던 것 중 하나는, 바로 고난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왜 자신의 고난을 성도들이 알기를 원했을까요? 물론, 자신이 주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고 있는지를 알리기를 위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도 바울은 이를 알리기를 원했을까요?

 

첫째, 그 당시 다른 성도들도 모두 고난 가운데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그와 같은 고난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리기를 원한 것이고, 둘째로, 자신이 고난 가운데서 어떤 위로를 받았는가를 말함으로 그들도 위로 받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자신이 어떻게 그 고난을 대했는가를 말함으로 그들로도 고난 가운데서 합당히 행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자신의 자랑이 되게 하고 싶었다고 말합니다.(고후1:14) 사도 바울이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고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고난 가운데 있지 않은 사람은 주님을 믿음이 없는 사람이거나, 믿지 않는 사람 둘 중에 하나였을 정도로, 당시에는 모든 성도들이 믿음을 인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그런 일들이 많습니다. 특별히 이교도가 대부분인 나라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하기도 합니다.

 

물론,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난은 죄를 인해서 오는 고난이 아닙니다. 또한 먹고 살기 위해 받는 어려움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고난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해 오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인해 오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또한 복음을 전함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을 말하는 것이요, 죄를 범하지 않고, 나아가 의로운 삶을 살아감으로 인하여 오는 고난을 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받은 고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 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고전 4:9)” 그는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졌다고 말합니다. 두들겨 맞았고, 감옥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고난을 받은 사도 바울이 불평을 하는 것을 우리는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는 그가 고난에 대한 시각이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난을 통해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게 된다고 믿었습니다.(9절) 자신의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고난을 허락하셨다고 믿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많은 고난 가운데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실패하게 되는 것은 그 고난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고난의 목적과 유익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았습니까? 그는 고난을 통해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도 이와 같은 시각을 가지고 고난을 바라보십니까? 어떤 사람들은 고난이 올 때,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고난은 우리에게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해주며, 또 우리들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욥기서를 읽으면서 실망하는 그리스도인은 아무도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욥의 삶 배후에 드러나며, 고난 이후의 어떤 결과가 온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실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 말씀에서 고난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이와 같은 이유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서 어떻게 역사하시며, 그 고난의 목적이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 또, 성도들로 하여금 힘을 얻게 하기 위해 이 말씀을 기록한 것입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고난에 대해 긍정적인 자세를 가졌습니다. 다윗이 그러했고,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요셉 또한 고난에 대한 그러한 자세를 가졌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리고, 보디발의 종이 되었으나, 억울한 누명으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는 그의 형들에게 “하나님께서 나를 이곳에 보내셨다.” 라고 말합니다. 그 모든 역경들의 이유를 그는 하나님에게서 찾았던 것입니다. 욥 또한 비슷한 고백을 합니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이도 여호와시니라.” 바로 이와 같은 자세를 가진 사람이 고난 가운데 실패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고난에 대해 부정적인 자세를 갖는 사람이 실패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본문 말씀에서 보게 되는 사도 바울의 자세는, 사도 바울의 자세일 뿐 아니라 많은 성공한 그리스도인들의 자세입니다. 어떤 시각 장애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시각 장애인으로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어떤 사람은 거동이 불편하고, 또 어떤 사람은 청각 장애인인데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이 그들을 다르게 만드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고난을 보는 자세’입니다. 고난을 보는 자세가 그 사람의 신앙을 긍정적으로 만들기도 하고, 부정적으로 만들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의 환경 또한 좋았던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가 가는 곳마다 그를 죽이려 하는 사람들을 만났고, 또 그는 수없이 배척당하고, 매를 맞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자신이 만나는 환경에 대해 생각하기를 ‘이는 내가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환경이 어떠하던지 그 가운데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면, 그는 정말로 복 받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10절에서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시리라 또한 이후에라도 건지시기를 그를 의지하여 바라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생각해보고, 자신을 선히 인도하셨던 하나님께서 자신의 앞길 또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우리의 앞날만을 생각해보면, 막막하고, 두렵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 하나님의 선하신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공급하셨고, 인도하셨으며, 보호하셨던 흔적들을 우리는 느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기서 이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또한 사도 바울의 고백만은 아닙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들의 삶을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삶을 보호해주셨음을 고백했습니다. 야곱은 그가 나이 들어 바로 왕 앞에 섰을 때,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 나를 나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하나님...” 다윗은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며, 쉴만한 풀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 또한 주님 앞에 가기 전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신실하셨음을 고백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론

 

우리도 모두들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의 고난과는 비교도 되지 않고, 너무도 미약하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이 악한 세상에서 믿는 사람으로서 사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고, 순종하며 사는데 어려움을 겪습니다. 또 우리가 때로는 경제적인, 사회적인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어려움은 우리로 하여금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님을 닮게 하고,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기 위해서 이 고난을 허락하셨다는 생각을 갖게 되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을 신실하게 건지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여러분을 신실하게 보호하실 것입니다.

 

주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이시며,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세상이 나를 미워했으니, 너희도 미워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바라보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모든 환경은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만을 바라보도록 하기 위해 허락하신 환경임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고난 가운데서 믿음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