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교회 가운데 계신 주님
본 문: 계 1:9-20
설교자: 조 성 훈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하여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가로되 너 보는 것을 책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것 같더라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요한은 일곱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자기 자신을 그들과 같은 형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 안에서 한 피로 구속함을 받은 형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주의 일에 동참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구원받은 모든 형제 자매는 주님의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중에 그 누구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으며,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는 일이 어떤 것이 되었든지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일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또한 요한은 환난에 동참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요한이 이 글을 기록할 당시 그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 때문에 밧모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요한 뿐 아니라 그때 당시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환난 가운데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때문에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 요한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로 인한 환난 가운데 동참하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요한은 환난 뿐 아니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라에 동참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동참한다는 것이며 참음에 동참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주님으로 인해 믿음을 지키기 위해 많은 것을 참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좋은 점이 많지만 어려운 점도 많습니다. 정직하게 사업하다가는 망할 것이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오늘날 믿음을 지키며 살아갈 때 수많은 어려움이 찾아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원히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하나님의 나라에 동참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진정한 기쁨과 평안을 누리게 됩니다.
요한은 밧모섬에서 주의 날, 다시 말해 주일에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본 것을 일곱 교회에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6, 20절 말씀을 보면, 주님의 손에 일곱 별과 일곱 촛대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는 교회와 장로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손에 교회와 그 일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손 안에 있다는 것은 주님의 통제 아래, 보호 아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깨달을 때 우리가 지녀야 할 마땅한 자세는 두려움이어야 합니다.
“...몸을 돌이켜 나더러 말한 음성을 알아 보려고 하여 돌이킬 때에 일곱 금 촛대를 보았는데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우리는 이 말씀에서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솔로몬은 성전을 위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온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작은 전에 거하시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의 눈을 이곳에 두시고 하나님의 이름을 이곳에 두셔서 세계 각처에서 이 전을 향해 기도하는 자가 있거든 그 기도를 들으시고...” 그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곳에 자기 이름을 두시고 그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들으시고 자기를 찾는 자를 찾으셨습니다. 하지만 신약에 와서는 교회가 그 성전이며 하나님께서 교회 가운데 계신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을 통해서도 교회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음 주일에 우리 교회에 주님이 오신다고 하면 아마도 빠질 성도님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어떤 중요한 약속이 있다 하더라도 교회에 나올 것입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약속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교회 가운데 항상 함께 하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가짐은 어떠해야겠습니까? 주님께서 주일날 아침부터 우리와 함께 하신다면 우리가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하겠습니까? 우리의 자세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3장 16절에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라고 말하고 있고 디모데전서 3장 15절에서는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회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가운데 주님이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요한계시록을 공부할 때는 말씀 그대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14절 말씀에서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다고 말한 것은 성결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주님께서 교회를 성결케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교회를 성결케 하십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서 주님께서 더 많이 열매 맺게 하기 위해서 가지를 잘라내시고 또 깨끗케 하신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교회를 정결케 하십니다. 이것은 제가 수년 동안 목회를 해오면서 깨달은 진리 중 하나입니다.
“그의 음성은 많은 물 소리와 같으며” 주님께서는 성령님을 통해 교회에 명령하십니다. 요한계시록 2장부터의 말씀을 읽어보면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에게 하는 말을 들을지어다.’ 라는 말씀이 자주 나옵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영혼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을 들으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왜 지역 교회에 직접 말씀하시지 않고 요한을 통해 말씀하셨을까요? 주님은 성경을 통해서 강단에서 전해지는 말씀을 통하여,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들을 귀 있는 자들을 들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기 시작하면 우리는 세상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은 굉장히 복받은 것입니다. 우리를 주님 안에 거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굶주려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갈급함을 느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복된 것입니다.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오른 손에 일곱 별이 있다는 것은 교회가 주님의 통제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온다는 것은 주님께서 교회를 보호하고 계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교회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주님께서는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절대로 자기 사람들을 잃어버리시지 않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면 절대로 우리의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주님의 손을 붙잡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 손을 붙잡고 계신 분은 바로 주님이십니다. 아이가 부모 손을 잡고 있는 것과 부모가 아이 손을 붙잡고 있는 것은 다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안전한 가운데 있습니다.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주님은 교회를 촛대에 비유하셨습니다. 왜 촛대에 비유하셨을까요? 그것은 다름 아닌 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밝게 비추는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고 그 빛을 세상을 향해 비추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나타내길 원하십니다. 흑암의 권세 아래 있는, 사망의 그늘 아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라는 빛을 통해 자신을 나타내길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개개인은 우리의 가정에서, 직장에서 그리스도를 밝게 비추는 빛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빛이 모여서 유평교회를 이루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이 교회에 오면 진정한 빛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하고,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만일 교회가 그 빛을 잃는다면 사람들은 그 어디에서도 진정한 빛을 찾을 수 없고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내가 볼때에 그 발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찌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7절)” 요한은 주님을 보았을 때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말합니다. 요한은 3년 반 가까이 되는 시간을 함께 했었습니다. 그 뿐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도 보았고 주님께서 승천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주님을 보았을 때 죽은 자처럼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여전히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었고 주님은 하나님의 모습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에 그 앞에서 온전히 서 있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본모습을 보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본 수많은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처럼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한편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요한에게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부활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인간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셔서 인간들의 죄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은 정말로 믿기 힘든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진실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고 이제 영원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부활이요 생명이니” 주님께만 사망과 음부의 열쇠, 즉 생명의 열쇠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앞에서 죽은 자처럼 되었던 요한에게 주님은 두려워말라며 그를 위로하십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은 요한에게 그가 본 것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 보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주님께서 보여주신 일들을 기록하여 일곱 교회에 보냈고, 또한 그 기록이 오늘날까지 전해져 우리에게까지 전해졌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결론
교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교회 가운데 계시고 교회를 청결케 하시며 교회를 보호하시고 교회를 인도하십니다. 또한 성도들을 권고하시며 격려하셔서 일하게 하십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요한의 편지를 통해서 주님께서 교회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얼마나 아끼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 주님께서 요한에게 말씀하셨던 것이 사실로 일어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어왔고, 지금도 말씀대로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읽고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행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은 22장에서 주님께서 속히 오신다고 말씀하실 때 “아멘 주 예수여 속히 오시옵소서” 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뭐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우리의 모든 수고를 아시며 우리의 모든 눈물을 닦으시는 주님께서 오실 때 기쁨으로 ‘아멘’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