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 그리스도인과 죄
본 문 : 롬 7 :15-25
설교자 : 조 성 훈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죄에 대한 감각과 죄의 결과
어떤 목사님이 무거운 죄의 짐에 대해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 때 한 젊은이가 목사님께 찾아와 이렇게 물었습니다. “목사님, 죄의 짐이 무겁습니까? 저는 하나도 무겁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목사님은 그 청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죽은 시체에게 돌을 올려놓으면 그 돌의 무게를 느끼겠습니까? 느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죽은 사람 역시 죄의 무게를 느끼지 못합니다.” 예화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들의 죄에 대한 감각은 불신자들과는 다릅니다. 자신이 죄에 대하여 무감각하다면, 그는 죽은 자, 또는 영적인 생명이 없는 사람이며, 죄를 깨닫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마음에 빛을 비추신 사람, 즉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죄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모릅니다. 하지만, 자신이 죄인인 것을 보기 시작하고, 죄에 대해서 무게를 느끼기 시작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빛을 비추기 시작하신 것입니다. 물론, 죄를 깨닫는다고 해서 다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빛 가운데 나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을 영접하지만, 또 다른 사람은 빛이 비출 때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싫어하여 등을 돌리고 세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이 죄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많은 어려움을 줍니다. 첫째, 성령님을 근심하게 합니다(엡 4:30). 둘째, 우리의 기도 응답을 받지 못하게 됩니다(벧전 3:7). 셋째, 힘을 잃게 됩니다(고전 9:7). 넷째, 우리의 기쁨을 빼앗아 갑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됩니다. 여섯째, 하나님과 우리, 그리고 성도들과의 교제가 깨어지게 됩니다. 이밖에도 죄의 결과는 참으로 많습니다. 문제는 우리 삶에 이러한 죄가 거한다는 것입니다.
죄와의 투쟁
사도 바울 또한 죄의 문제와 힘겨운 싸움을 했던 것을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 사도 바울은 15-17절에서 구원 받았지만, 때때로 죄로 인해 넘어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지만, 이를 대적하는 마음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자신 안에 거하는 죄가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자 하는 마음을 막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자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대해 그는 커다란 실망을 합니다. 우리도 그와 같은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통해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읽고, 하나님 앞에 자신의 잘못들을 회개하며 사랑하지 못하는 형제, 자매를 사랑해야겠다고 다짐했는데, 막상 만났을 때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얼굴을 붉히고, 속으로 저주를 퍼붓고 왔을 때, 그 때의 심정이 어떻습니까? 속을 도려내는 것 같은 아픔이 우리게 있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정욕이 항상 함께 존재하고, 싸우고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은 육체의 정욕을 거스르고, 육체의 정욕은 성령의 소욕을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육체의 정욕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사도 바울은 두 번째 문제를 말하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 안에도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면, 정말로 선한 것이 거하지 않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성령이 거하시면, 우리 안에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고,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 즉 새로운 속성이 생깁니다. 또한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서려 하고, 계속해서 죄 가운데 있지 않으려고 합니다. 죄를 즐기지는 않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육체의 욕구 또한 거듭난 그리스도인 안에 계속해서 거한다는 것입니다. 이 육체의 구는 계속해서 우리로 하여금 악을 행하도록 권장합니다. 일예를 들어보면, 우리는 우리가 받았던 것 중에 선한 것, 좋은 것은 금방 잊어버리지만, 서운하고, 우리에게 잘못 행한 것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바로 이 죄악 된 성품들이 우리 안에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구원 받았다고 해서 육체가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구원 받고 나서도 넘어지는 게 정상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육의 소욕이 적어지는 것뿐이지 육의 소욕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이 가운데 괴로워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19절에서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워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라고 말합니다. 정말 하고 싶은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성도들을 사랑하며,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인데, 막상 자신이 해놓은 것을 보면, 그와는 반대의 일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으로 사도 바울은 탄식하고 있는 것입니다. 20절에서 사도 바울은 “이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자신의 책임을 회피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지어놓고 죄를 짓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한 주체가 자신 안에 거하는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성품이 죄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죄가 죄를 주장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런데, 완전 성화주의자들은 죄를 지어놓고도 죄 지은 것은 이제 자신이 아니며, 자신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잘못된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모든 행동에 대한 책임은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옆집에 가서 물건을 훔쳐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물건을 훔치다가 경찰에게 잡혀 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 내가 내 책임이 아니라고 말한다면, 어떠합니까? 저 사람이 나에게 하라고 했다고 말하면, 나는 풀려나게 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죄악을 행하게 하는 그 주체가 새로운 성품이 아닌 그 안에 거하는 ‘죄’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21-23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세 번째 고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선을 행하기 원하는데, 악이 함께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깨닫는 진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신 안에 선한 것도 있고, 악한 것도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 받은 사람들 모두에게 이 두 가지는 실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이 악한 생각에 사로잡힐 때, 굉장한 고통을 느끼곤 합니다. 반면, 우리 안에 있는 성령님의 소욕을 따라 삶을 살 때에는 승리의 삶을 살게 됩니다. 사람은 그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거듭거듭 일어나는 선한 생각은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님 때문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집에 누군가 이사 오면, 그에게 전도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됩니다.계속해서 그런 부담감을 가지게 됩니다. 하지만, 또 한편, ‘그 사람 오늘 피곤할 텐데, 가면 실례가 될 거야.’ 라는 생각도 듭니다. 사도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선한 생각들이 있는데, 악한 생각이 그 선한 생각을 사로잡아서 결국은 선한 일을 하지 못한(전도하러 가지 못한) 자신을 보는 것이 괴롭다는 것입니다. 선한 생각이 있고,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지만, 다른 악한 생각들에 사로잡히기도 하는 것입니다.
해결책
그래서 사도 바울은 24절에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말씀에서 그는 구원받은 사람들도 육체 가운데 탄식하면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말합니다(롬 8:23). 왜 구원 받은 사람들이 탄식 가운데 살아갑니까? 그것은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구원받은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죄의 정욕들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수 없고, 때때로 넘어지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해드리지 못하고, 하나님의 이름에 욕을 돌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슬픔을 드렸다는 것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이 육체의 몸을 벗어나면, 우리는 새로운 몸을 입게 됩니다. 허름하고, 비만 오면, 비가 새는 집에 사는 사람들이 그 집에서 사는 동안은 낡은 집 때문에 생기는 어려움은 피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 산 아파트에 들어가면 어떻습니까? 상황은 완전히 바뀝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육체 가운데 있는 동안은 육체의 연약함으로 인해 오는 괴로움을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새로운 성품을 갖게 되지만, 그것이 육체 가운데 있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육체의 몸을 벗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이 육체의 몸에서 건져내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새 몸을 입게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탄식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은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지만, 그 때에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 이상 미워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온전히 사랑할 것입니다. 또한 마음이 공허하거나, 가을을 탄다거나 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결론
우리가 우리의 육체로부터 해방 받을 그 날까지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싸움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이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할까요? 우리는 신명기 17장 18-20절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가 왕위에 오르거든 레위 사람 제사장 앞에 보관한 이 율법서를 등사하여 평생에 자기 옆에 두고 읽어서 그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며 이 율법을 모든 말과 이 규례를 지켜 행할 것이라 그리하면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아니하고 이 명령에서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리니 이스라엘 중에서 그와 그의 자손의 왕위에 있는 날이 장구하리라.” 또 갈라디아서 5장 16-17절에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싸움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옆에 두고 그것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힘을 얻는 것입니다. 그 때에 육체의 소욕은 그 소리가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또 육체의 소욕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제시해준 처방전입니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우리는 심한 내적 투쟁을 겪게 됩니다. 죄에 대한 예민한 사람일수록, 주님과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돌아보시고, 하나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 육체의 소욕을 이루지 않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