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 그리스도인의 연합(1)
본 문 : 롬 14:1-13
설교자 : 조 성 훈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찌니라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 이러므로 우리 각인이 자기 일을 하나님께 직고하리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하나님께서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실 때,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요한복음 17장 21절에서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유일한 계명은 “서로 사랑하라”입니다. 다시 말해, 교회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임으로 인해 하나가 되기가 어렵습니다. 다섯 사람만 되어도 하나 되기가 참으로 힘든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때문에 하나 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교회가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하나 되는 것은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하는 좋은 간증이 됩니다. 서로 배움이 다르고, 출생지가 다르며, 부가 다르고, 여러 가지가 다르지만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바로 교회의 놀라운 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셨다(accept).(1-3절)
교회에는 정말로 다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믿음이 약합니다.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것을 잘 하지만, 반대로, 사람들 앞에 나가면 한 마디 말도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은 1절에서 서로를 비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을 때, 자신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을 받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받으셨으므로 나도 받는다는 자세를 가져야 받을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당시 로마에는 유대인들도 있었고, 또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특별히 음식으로 인해 오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마치 오늘날 외국 사람들이 한국 사람들이 보신탕을 먹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때 당시에도 그러한 문화 차이로 인해 오는 하나 됨의 어려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역시 생각 차이로 인한 많은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주일을 안식일로 생각하여, 주일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주님을 묵상하고, 성경을 보고 찬송만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차의 기름도 넣지 않고, 그 어떠한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보면,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런 사람들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안 좋게 생각하지 말라고 말합니다.(비판하지 말라-1절)
저는 주일학교 교사들을 참으로 존경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보기에 정말 산만하고, 어수선한 어린 학생들에게 화를 내지 않고, 인내함으로 그들을 붙잡아주고, 격려해주는 주일학교 교사들의 모습은 정말로 위대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그렇게 온유하게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으라.”고 말합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어린 성도들이 많고, 그렇기 때문에 어린 성도들을 이해하고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죄 짓는 것을 용납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연약한 믿음으로 인해 나오는 행동들을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등의 절기 등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반대로, 부활절이나 크리스마스 행사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럴 때, 지키는 사람은 안 지키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고, 지키지 않는 사람은 지키는 사람을 용납하는 것이 바로 연합을 지킬 수 있는 길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평가합니다. 또 자신의 영적 수준과 가치관으로 다른 사람들을 옳다, 아니다 판단합니다. 하지만, 옳고 그른 것은 주님의 말씀에 의해 가려지는 것입니다. 주님이 옳다 하시면 옳은 것이요,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절대로 내 생각이나 가치관이 판단 기준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누가 더 낫다고 평가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 모두는 별 차이가 없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마치 주일학생들이 서로 나이가 많다고 다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나 가치관에 의해 판단하고 정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받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서로를 용납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 전도’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아주 멸시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면, 이방인들은 지옥의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불쏘시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을 상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베드로에게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시기 전에 환상을 통해 베드로의 생각을 바꿔놓으셨습니다. 베드로는 환상 속에서 온갖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이 보자기에 싸여있는 것을 보았고, 주님께서는 그것을 베드로에게 먹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먹을 수 없다고 세 번이나 말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한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교훈입니다. 내가 보기에 더러워 보여도 하나님께서 거룩하다고 말씀하시면, 그것은 거룩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거룩하다 여기시고 받은 성도들을 우리가 부정하다고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이 우리 생각의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셨으므로, 나도 받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고넬료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때 고넬료의 집안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났고, 베드로와 함께 간 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구원의 역사가 일어남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와 같이 주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여 서로를 받을 때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받으신 사람이라면 나도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바로 연합의 기초입니다. 나와 비슷하고, 같은 점이 있다고 해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내가 중심이 되는 연합입니다. 하지만, 내가 중심이 되는 연합은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받으셨기 때문에 받아야 한다는 생각 위에 연합을 이룰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을 붙들고 계신다.(4절)
우리가 성도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성도들이 남의 하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니는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의 사원들을 평가하거나 비판할 수 없습니다. 우리 회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은 4절에서 남의 하인을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 우리는 주님에게 채용된 하인들이지, 다른 사람에게 채용된 하인들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의 일어서고 넘어짐 역시 주인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가 세워지고, 세워지지 않는 것 역시 하나님께 달린 일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면 부름을 입는 것이요, 주인이 쓰시겠다고 하면, 쓰임을 받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정황이나 상황을 잘 알지 못하고, 쉽게 판단을 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오래 전에 피아노 위에 있는 거울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고, 안 좋게 여겼던 적이 있습니다. ‘왜 피아노를 치면서까지 거울을 볼까?’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중에서야 그것이 지휘자의 신호를 보기 위함인 것을 알고 한참을 웃었던 적이 있습니다. 만약, 피아노 치는 자매에게 그런 이야기를 했다면, 저는 정말 잘 알지도 못하고, 쉽게 판단하는 실수를 저지를 뻔 했던 것입니다. 각각의 사람들에게는 상황이 있고, 우리는 그것을 다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형제, 자매가 주님의 종임을 알고,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각 그리스도인들이 고려하는 것은 주님이시다(5-9절)
우리가 성도들을 판단하고 정죄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각각의 성도들이 고려하는 것은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안 지키는 것도 모두 주님을 위해서입니다. 물론 안식일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고만은 말할 수 없지만, 그 동기만을 봤을 때, 그것은 주님을 위해서 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쉽게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비록 내가 싫어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떤 사람이 어떤 음식을 먹는다면, 이는 그가 주님을 위해서 그러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이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 중 누구도 자신을 위하여 살거나 죽는 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다른 성도들을 쉽게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게 되고, 나아가 교회의 연합을 이룰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연합을 이룬다면, 우리를 통해 세상은 변화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훈련시키신 제자는 열두 명에 불과했지만, 나중에는 120명가량이 되었고, 지금은 전 세계에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하나가 된다면, 서로에게 지체의 사랑을 보여준다면, 세상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을 믿는 자임을 알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분열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싸우고, 파를 나누는 것은 마치, 자신의 배우자를 욕하는 남편, 또는 아내처럼 결국 스스로 욕을 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공부를 안 해오는 것 때문에, 안식을 지키고 안 지키는 것 때문에 서로를 판단하거나 정죄하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합니다. 서로를 돌아보고 격려하며, 세워주는 일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가 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나낼 것이며,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특출한 인도자 없이 질서 정연하게 광야를 지나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습니까? 이스라엘을 저주하러 올라간 선지자는 오히려 이스라엘을 축복했습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라는 생각이 있습니다. 때때로 넘어질지라도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라면, 그 마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생각으로 이 일도 해보고, 저 일도 해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을 위한 일들을 할 때, 정죄를 받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결론
나이 차가 많이 나는 형이 매우 어린 동생을 때렸을 때, 그것을 알고 그 형을 칭찬하는 부모님은 없을 것입니다. 도리어 그 형을 나무라고, 동생을 감싸주지 못한 것을 책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도 이와 같습니다. 교회 안에는 영적으로 어린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으며, 그들은 감싸주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판단과 정죄의 대상이 아니라 기도와 격려, 그리고 붙들어주고, 세워주어야 할 대상입니다. 영적으로 나이가 든다는 것은 판단하는 자리에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돕는 자리에 올라가는 것입니다. 형제가 많은 가정이, 서로 붙들어주고, 돌보며, 사랑을 나눔으로 화목한 것처럼 교회 역시 서로 붙들어주고, 사랑을 나눌 때, 아름다운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13절에서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연약한 자들을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그를 하나님께 맡기고, 이해하고, 붙들어주며, 세워줌으로 우리 교회가 하나 된 것을 지키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