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신분

2008년 February 17일 ()

본문: 고린도후서 11:16-33 |

주 제: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신분

 

본 문: 고후 11:16-33

 

설교자: 조 성 훈

 

“내가 다시 말하노니 누구든지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말라 만일 그러하더라도 나로 조금 자랑하게 어리석은 자로 받으라 내가 말하는 것은 주를 따라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어리석은 자와 같이 기탄없이 자랑하노라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 너희는 지혜로운 자로서 어리석은 자들을 기쁘게 용납하는구나 누가 너희로 종을 삼거나 잡아먹거나 사로잡거나 자고하다 하거나 뺨을 칠지라도 너희가 용납하는도다 우리가 약한 것같이 내가 욕되게 말하노라 그러나 누가 무슨 일에 담대하면 어리석은 말이나마 나도 담대하리라 저희가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아브라함의 씨냐 나도 그러하며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군이냐 정신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오히려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 주 예수의 아버지 영원히 찬송할 하나님이 나의 거짓말 아니하는 줄을 아시느니라 다메섹에서 아레다 왕의 방백이 나를 잡으려고 다메섹 성을 지킬새 내가 광주리를 타고 들창문으로 성벽을 내려가 그 손에서 벗어났노라”

 

성경은 주님에 대해 저가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또한 세례 요한이 예수님께 사람을 보냈을 때 예수님께서는 앉은뱅이가 걸으며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이 전파될 것이라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면 메시아가 부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보냄을 받았다는 말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부자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부자가 구원받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마치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기로 예정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기 때문에, 그 결과로 이방인들이 택함을 입게 되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이것을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사람들에게 청했을 때, 누구는 장가들어서 못가고 누구는 밭을 사서 못가며 누구는 소를 사서 못 간다고 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때 주인이 말하기를 산과 들에 가서 가난한 자들과 저는 자들, 불구자들, 천한 자들을 불러 잔치 자리를 채우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구원받은 사람들을 보면 대개 세상에서 못 배우고 못 나고 천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자들을 구원하시는 이유는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 자들이 주님 안에 들어왔을 때 완전히 새로운 신분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비극적인 사실은 교회 안에서도 옛 신분 상태의 것들이 여전히 남아있어서 그리스도인들을 힘들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의 신분

 

성경에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제 예전의 육신적인 것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신분과 성품을 가지고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동안 교회들의 모습을 보면 옛 성품을 완전히 벗어버린 교회는 한 곳도 없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운데 이런 어려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서 오랫동안 머물며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많은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에 옛 성품과 옛 것들이 활개를 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사도 바울의 마음이 꽤 답답했을 것이라고 봅니다(11:19-21). 고린도 교회에는 사도 바울이 떠난 이후에 많은 거짓교사들이 와서 교회 안에 문제를 야기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 반대되는 것을 가르치고, 자신을 좇게 하려는 사람들이 있어 분파가 생기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육체를 따라 자신을 자랑하기를 자기 집안이 얼마나 뼈대 있는 집안인지를 자랑합니다(딛 3:9, 고11:22). 이것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입으로 이야기할 주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을 가지게 되었는데, 아직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신분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사람들이 더 비싼 옷, 더 좋은 차를 사려고 하는 것은 그것을 통해 자신을 더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려고 하는 이와 같은 것들이 바로 옛 성품입니다. 자신의 약점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조상이 위대함, 자녀의 성공, 옛 가족의 유명세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와서 새로운 신분은 얻은 이후에는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의 신분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새로운 신분으로 만드신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고(빌 3:20)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며(벧전 2:9)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복 받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엡 1:3). 또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10)”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슬퍼하는 자였고 가난한 자였으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신분으로 얻은 부가 있으므로 더 이상 가난하지 않고 미련하지 않고 더 이상 천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보다 더 좋은 가족이 어디 있으며 그리스도인보다 더 큰 부자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의 눈을 열어 우리가 받은 축복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받은 축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교회 안에 존재했던 세속적인 가치관들

 

교회 안에 여전히 세속적인 가치관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인인 것, 아브라함의 후손인 것, 이스라엘 사람 중에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들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교회 안에 여전히 빈부차이가 있고 지식차이로 인한 차별이 있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 안에 모두 하나님의 아들, 딸이 되었는데 그 안에서 빈부차이가 존재할까요(약 2:1-4). 그리스도인은 새로운 신분으로 새로운 부와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도 미련하거나 가난하거나 어리석지 않습니다(고전 1:19-20, 고전 3:18-20).

 

그러나 고린도 교회 안에서 육신적인 가치관에 따라 서로 다른 대접을 받고 있는 것을 봅니다. 세상 사람들은 돈과 지식의 많고 적음에 따라, 집안이 어떤 집안이냐에 따라 차별대우를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까지 그것이 들어올 수 없습니다.

 

돼지농장에 찾아가서 돼지들의 모습을 구경한다고 합시다. 그 중에서도 잘 생기고 잘 먹어서 다른 돼지들보다 더 잘난 돼지가 있고, 반대로 못나고 뒤처지는 돼지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잘난 돼지나 못난 돼지나 돼지의 운명은 무익합니다. 그런 운명과 다름이 없는 우리를 구원해내 새로운 신분을 주었는데, 이제 다시 과거의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차별대우한다는 것은 뭔가 잘못된 것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신의 높음을 자랑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약 1:9). 내가 과거에는 이렇게 낮았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높아졌고 부해졌으며 얼마나 축복받았는지를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서 보면 세상에서 우리가 자랑했던 것들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들이었는가, 하늘나라의 축복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또한 부한 자들은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라고 했습니다(약 1:10-11). 부한 것이 얼마나 헛되고 덧없는 것인가를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도들 가운데 논의되어서도 안 되고, 교회 안에서 이것을 가지고 좌절하거나 우쭐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이 하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함께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돈이 많고 적으냐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의 일인가. 가방 끈이 길고 짧은 것에 대해서 사람을 평가하는 것이 믿는 사람이 할 일인가. 그 모든 것들은 다 부질 없는 것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신분, 새로운 삶, 새로운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과 지식의 많고 적음은 과거에는 중요했을지 모르지만 구원받은 후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루살이가 인간에게 와서 돈 자랑, 지식자랑을 한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눈으로 보면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삶이 아름답고 귀하게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구원받은 분들이라면 고린도교회의 어리석은 사람들처럼 세속적인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는 세속적인 가치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눈을 열고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여러분의 새로운 신분을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