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편] 4강 세례(침례)로써 장사됨

2019년 May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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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과 세례로써 장사됨"

세례에 대한 교회의 전통과 실행에는 많은 차이점들이 존재한다. 경건한 사람들 간에도 의견이 다르다. 그럼에도 세례는 여전히 그분의 모든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기본 명령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마28:19). 신자들은 구원을 받은 후 세례를 받아야 한다(막16:16).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가르침을 충성스레 배웠고 진심으로 그것에 복종했다(행 2:38, 41; 8:12, 36-39; 9:18; 10:47; 16:15,33; 18:8; 22:16). 그것은 그들의 첫 단계의 순종이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새 신자들은 종종 핍박의 대상이 되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인이 된 자들로서 그들이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분의 명령에 부응하여 기꺼이 이러한 공적인 신분 고백의 단계를 밟고자 하였다.

다른 세례들도 있는가?

위에서 인용된 구절들은 본과의 주제인 신자의 세례로 불리는 세례를 가리킨다. 여기서는 먼저 이 세례와 구분되는 다른 세례들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유대인의 의식적인 정결법(눅 11:38-39; 막 7:4; 히 6:2; 9:10).
구약성경에서 제사장들은 이러한 방법으로 정결함을 입었다. 후에 먹고 마시는 그릇들을 이같이 씻었으며,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의식적으로 물로 씻었다. 이방인 중에서 이스라엘 회중으로 들어온 개종자들은 불결함을 씻기 위해 물 속에 몸을 담그었다.

2. 요한의 회개의 세례(막 1:2-4; 눅 3:3-4; 요 1:31; 행 13:24).
이것은 이스라엘의 민족적인 회개에 대한 요청이다. 메시야의 선구자로서 요한은 "주의 길을 예비해야"했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인의 세례와 달랐다(행 19:3-5). 그것은 물 속에 잠기는 것을 요구했다(마 3:16; 요 3:23). 주 예수님은 회개할 필요가 전혀 없었으나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 3:14-15). 요한에 의한 그리스도의 세례는 그분의 공사역의 시작을 의미했다.

3. 그리스도의 고난의 세례(눅 12:50; 막 10:38-39; 마 20:22).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으셨다(사 53:4; 벧전 3:18). 우리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분은 하나님의 진노의 파도 아래 잠기신 것이었다(시 43:7).

4. 성령의 세례(마 3:11; 막 1:8; 눅 3:16; 요 1:33; 행 1:5; 11:16).
이것은 요한에 의해 예고되었고 오순절에 시작되었다(행 2장). 그 목적은 신자들을 그리스도의 몸 안에 연합시키는 것이었다(고전 12:13). 달리 표현하면 그것은 우리를 그분께 연합시키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있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불(마 3:11-12; 눅 3:16-17), 모세(고전 10:2), 죽은 자(고전 15:29) 등과 관련하여 나타난 "세례"란 단어를 여기에 적용시키려 해서는 안된다. 그것들은 그 목적상 성령의 세례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누가 세례를 받아야 하는가?

신약성경에는 적어도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함 없이 어떤 사람이 신자의 세례를 받았다는 분명한 기록이 일체 없다. 구원에 앞서 세례를 주는 것이 많은 교회들의 관례로서 오랜 세월 동안 행해져 왔으나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관례를 찾아볼 수 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령에서 "제자를 삼아...세례를 주라"는 분부를 보게 된다(마 28:19).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막 16:16). 오순절에 베드로는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말했다(행 2:37-38). 에디오피아 내시는 빌립이 세례를 주기 전에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다(행 28:36-37). 고린도인들은 믿고, 그 다음에 세례를 받았다(행 18:8). 우리는 복음을 믿음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며(엡 1:13; 고전 15:1-4), 세례는 그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전 1:17). 회개와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이 반드시 먼저 온다(행 20:21).

유아 세례는 옳은 것인가?

신약성경에 유아세례에 대한 아무런 분명한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많은 교회들의 관례가 되어왔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이 교회들은 첫째는, 지옥으로부터의 유아들의 구원을 보장하기 위해, 둘째는 이 후에 "확증"으로 "인쳐지게" 될 구원의 과정을 시작하게 하기 위해, 셋째는 그 세례 겸 헌신의 의식을 통해서 아이의 부모에게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녀를 양육하는 것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기 위해서 유아들에게 세례를 실행해 왔다. 세례를 받지 않으면 유아가 지옥에 가게 된다는 생각은 물론 하나님에 관한 매우 그릇된 생각이다. 더더욱, 유아 세례는 구원의 과정의 일부로서 그것을 통해서 유아가 은혜를 얻게 된다는 생각도 동일하게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이 세례 겸 헌신의 의식은 아무리 외형이 아름답다 하더라도 신약성경의 본과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은 근거로 유아세례를 지지해 왔다.

1. 자주 인용되는 구절들.
마가복음 10장 13-16절과 마태복음 19장 13-15절이 종종 유아세례를 지지하는 구절들로 인용되곤 한다. 어머니들이 그들의 아이들을 예수께 데려오자 그분은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이들에게 세례는 베풀지 않으셨다. 그분은 다만 그들을 축복하셨다. 만일 제자들이 그들의 주님과 함께 구원의 근거로 유아들에게 세례를 주었다면 그들은 아이들을 내쫓으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이가 말했듯이 "우리는 본문에서 예수님은 보지만 물은 보지 못한다. "마태복음 18장 2-6절도 자주 인용되는 구절이다.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그분의 실물 교훈의 소재는 어린 아이였고, 그분은 어린 아이를 무리의 중앙에 놓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교훈의 주제는 세례가 아니라 겸손의 필요성이었다. 그 외에 고린도전서 7장 14절도 인용되는데 여기서 신자들(부모중 하나라도 신자일 경우)의 자녀들이 "거룩하다"고 불리운다. 이 말은 "분리되었다"는 뜻으로 신자들의 자녀가 처한 특권적인 위치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위치는 세례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 아니며, 세례를 필요로 하지도 않는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인 부모를 가졌다고 해서 "교회 안에 자동적으로 영접된" 경우가 일체 없다. 구원은 새로운 출생으로 말미암지 자연적인 출생으로 말미암지 않는다(요 1:13; 3:5-7).

2. 할례를 근거한 주장.
유대인의 자녀들은 태어난지 8일만에 할례를 받음으로써(눅 1:59) 유대 민족에 입적을 했다. 이 사실을 근거로 그리스도인들도 그들의 유아들에게 세례를 베풀 자격이 있다는 주장이 제기돼 왔다. 골로새서 2장 11-12절이 인용되는데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할례를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그것을 통해 죄를 제거하실 수 있었던 그분의 죽음을 가리킨 말씀이다. 이 구절은 유아세례의 근거가 전혀 되지 못한다.

3. 가족세례를 근거한 주장.
루디아의 구원(행 16:14-15), 빌립보 간수(행 16:30-33), 그리스보(행 18:18), 스데바나(고전 1:16; 16:15) 등은 가족이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기록된 예들이다. 이를 근거로 어떤 이들은, 이들 가정들에는 필경 유아들이나 믿음을 행사하기에는 너무 어린 아이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 그들은 비록 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 언급이 없지만 그런 아이들이 세례에 포함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이해하고 믿을 수 있는 연령의 사람들만이 세례를 받았다고 추정하는 것만이 유일한 합리적인 추측일 것이다(행 16:34의 예처럼).

신자의 세례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은 때때로 씻는 것과 연관이 있으나, 그러나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깨끗함을 입을 수 있다. 세례의 중요한 상징, 혹은 모형은 죽음, 장사 및 부활이다(롬 6:3-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우리의 것으로 여기시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위치시키신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죽었으며 그분과 함께 부활했다(골 3:1-3; 롬 6:6-11). 세례는 이같이 신자와 관련하여 이미 일어난 일들에 대한 모형, 혹은 그림이다. 신자는 세례의 예식을 통해서 상징적으로 죽음과 장사됨과 부활을 통과하게 된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자는 그를 대신해서 죽고 장사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동일시된다. 그리고 자신이 그리스도와 한 몸임을 고백하게 된다. 세례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불리운다(벧전 3:21). 신자는 이같이 공적으로 고백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십자가 위에서 행하셨습니다. 나는 그 사실을 진심으로 믿었습니다. 이제 그것을 그분께서 명하신 이러한 방식으로 외적으로 표현합니다. 나는 그분과 동일시되었습니다." 이러한 동일시 행위는 "세례받은 삶"이라 불리울 수 있는, 그분과 동행하는 삶의 실천을 수반해야 한다.
우리는 성경에는 사용되지 않았으나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용어들에 대해서 토론할 필요가 없는데, "성례,의식, 예식, 입교식, 성찬식, 은혜의 인침, 정화식, 서약" 등이 그 예이다.

세례가 구원을 줄 수 있는가?

엄청난 수의 교회들이 소위 "세례 중생"교리를 가르치는데 이것은 물 세례가 실제로 중생케 하고 죄를 제거해 준다는 이론이다. 이들이 인용하는 성경 구절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요한복음 3장 5절.
"물과 성령으로 난다"는 표현은 중생이 물세례를 통해서 온다는 암시처럼 보인다. 첫째로,여기에 "세례"란 말이 언급되지 않은 점을 주목하라. 물은 항상 세례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요한복음 7장 38-39절에서 그것은 성령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물과 성령 사이의 접속사 '카이`는 일반 접속사가 아니며, "곧"으로 적절히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그렇게 되면 이 어구는 "물, 곧 성령"으로 읽을 수 있다. 요한복음 3장 6, 8절은 사람이 "성령으로 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어떤이들은 물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요한복음 15장 3절은 말씀으로 씻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에베소서 5장 26절은 물과 말씀의 긴밀한 관계를 보여주며, 베드로전서 1장 23절은 새로운 출생이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요한복음 4장 14절에서 주님께서는 영생의 물을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3장에서는 중생에 대한 비유로 바람과 놋뱀이 사용되었는데 두가지 모두 물세례와 거리가 먼 묘사임을 알 수 있다. 바람은 그 부는 모양이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감지할 수 없는데 여기서는 세례의식에 대한 아무런 암시도 찾아낼 수 없다.

2. 디도서 3장 5절.
이 구절은 "중생의 씻음"은 언급하고 있지만 그러나 다시 지적하지만 "세례"란 말은 사용되지 않았다. 바로 이어서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란 표현이 나온다. 게다가 "씻음"이란 단어는 헬라어 `밥티스모스'가 아닌, 목욕의 의미로 사용되는 `로우트론'에서 나온 말이다.

3. 베드로전서 3장 21절.
"물은...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는 표현은 세례에 의한 구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구절은 그것이 씻는 것이 아니라 양심의 반응이라고 덧붙임으로써 이러한 의미를 약화시킨다.이 구절의 배경으로 땅을 멸하고 보호의 방주를 뜨게 한 노아 시대의 심판의 물이 언급돼 있다(20절). 이 그림에서 그리스도께서 보호의 방주이다. 그분은 우리를 대신해서 죽음의 물을 통과하셨으며,우리는 그분과 함께 동일한 물을 통과한다. 이같이 그분은 심판으로부터의 안전과 구원을 예시해 주는 상징과 모형과 그림이다. 우리는 물세례 안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한 것이다.

4. 마가복음 16장 16절.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라는 표현은 세례를 구원의 필수조건으로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는 다음 구절을 간과하는 셈이 된다. 여기에는 "세례를 받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고 기록돼 있지 않다.

5. 사도행전 22장 16절.
이 구절에는 "세례를 받고 너의 죄를 씻으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죄의 제거가 세례에 의해서 되어진다고 가르치는 듯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죄 사함이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이뤄진다는 사실을 부정하게 된다(요일 1:7; 히 9:22). 이 구절은 바울의 구원 간증의 일부이다. 아나니야는 바울에게 세례를 받으라고 권한 한편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 한다고 권면했다(롬 10:13). 세례용 물은 죄를 씻어 내지 못한다(계 1:5).

다음과 같은 예들에서 볼 수 있듯이 성경은 물이 우리의 구원자가 아님을 가르쳐 준다.

(1) 십자가 위의 강도는 물 없이 구원을 받았다(눅 23:43).

(2)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사람들에게 항상 세례를 주지는 않았는데, 만일 세례가 중생을 가져다 준다면 이것은 변명의 여지 없는 과오였을 것이다(고전 1:14-17).

(3) 예수님은 자신이 구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세례를 베풀지 않으셨다(요 4:2).

(4) 이방인들은 물로 세례를 받기 전에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았다(행 10:44-48).

어떻게 세례를 받는가?

1. 양식.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물에 잠금(침수)으로써 세례를 베풀었다. 그런데 물을 붓거나 뿌리는 관습이 2세기에 생겨나 3세기 경에 널리 확산된 듯이 보인다. 그러나 성경이 제시하는 세례의 양식은 요한(마 3:16; 요 3:23)과 빌립(행 8:38-39)의 예가 보여 주듯이 침수 세례이다. 또한 세례의 상징하는 바가 침수를 요구하는데,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됨(롬 6:4; 골 2:12)은 머리에 몇 방울의 물을 떨어뜨리는 것보다 물 속에 완전히 몸을 잠그는 것으로 한결 훌륭하게 표현된다. 때때로 "물 한 방울은 대양과 마찬가지다"라고 말해지지만 물 한 방울로는 장사를 거의 나타낼 수 없다. 또한 세례(혹은 침례)란 말의 의미가 침수, 혹은 물 속에 담근다는 뜻을 담고 있는바 그 말의 어근의 의미는 단순히 "담그다"는 것이다.만일 하나님의 성령께서 뿌리는 것을 말하려고 의도하셨다면 다른 단어(란티조)가 사용되었을 것이다.이같이 실행,의미 및 어의의 모두가 침수에 의한 세례를 가리키고 있다.

2. 권위. 세례의 권위,혹은 근거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이다(마 28:19). "예수의 이름으로" 혹은 "주의 이름으로"(그 밖에 다양한 형태가 있다)라는 표현이 사도행전 2장 38절, 8장 16절, 10장 48절 등에 사용되어 있는데 이것들은 특히 신자의 세례를 요한의 세례와 구분하기 위해서 간략히 표현한 예들로 보인다(행 19:3-5).

3. 세례자. 세례자는 반드시 주님과 그리고 교회를 대표하는, 신자들의 일원이어야 한다. 아무런 자격 요건도 필요하지 않다. 소위 "평신도"와 구분되는 성직자의 임명은 신약성경에서는 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왜 세례가 그토록 중요한가?

여기서 우리는 "만일 세례가 우리 죄를 씻어주거나 우리를 교회에 가입시켜 주거나 우리의 구원을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왜 그토록 세례가 중요한가?"라고 자문해 볼 수 있다. 아래의 사실을 살펴보자.

1. 세례는 지상 명령의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주님의 지상명령에 개인적으로 순종한다는 것은 그 분부대로 세례를 실행하고 우리의 제자들에게 그것을 가르치는 것을 포함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내(그리스도)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치라는 명령을 순종하게 된다(마 28:19-20).

2. 세례는 세상에 대한 증거가 된다.세례는 우리의 믿음을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여 주는 가장 효과적은 증거 중 하나이다.

3. 세례는 다른 신자들에 대한 증거가 된다. 세례는 신자가 그리스도의 인격 및 사역과 동일시된 것을 외적으로, 공적으로 나타내는 것인바 이는 또한 다른 신자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의미한다.신자들이 그들의 신앙으로 인해 심한 핍박을 받는 일부 나라에서는 세례를 통해서 공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기를 꺼리는 기독교인들을 신자들이 경계를 한다고 한다.

결론

우리는 그리스도께로부터 세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받고 있다. 기독교 초기부터 그분을 믿는 신자들은 세례를 순종해 왔다. 우리는 선한 행실을 유지하며 떡을 뗌으로써 그분을 기념하며,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믿음을 증거하고 동료 신자들과 교제하도록 분부를 받고 있듯이 또한 우리는 세례를 받아야 한다. 그것은 구원을 위해서는 필요하지 않지만 순종을 위해서는 필요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세례받은 삶"을 영위함으로써 우리의 신앙 고백의 실제성을 나타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