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편] 5강 영원한 구원

2019년 May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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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과 영원한 구원"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다"고 하나님은 선포하신다(사 51:6b). 우리의 크신 하나님과 구주께서는 그분의 백성 가운데 일을 시작하셨고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다"(빌 1:6).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서 영원한 구원을 이루셨다(히 9:12).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은 영원하다(요 1:4; 5:26; 요일 1:2). 구원으로 말미암아 그 생명이 인간에게 부은바 되었다(요일 5:11-12). 영원한 생명이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요 5:24), 아들을 믿으며(요 3:15-16), 그리고 "그분의 살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그분의 십자가 구속 사역을 힘입는 다는 뜻임,요 6:56)자들에게 자유로이 주어진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롬 5:23; 요 17:2).
이 선물은 하나님께는,그분의 아들의 고난과 죽음을 감수해야 하는 심히 값진 희생이었다. 그것은 헌신이나 제자도에 의해 얻어질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그것은 선물이 아니라 우리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기 때문이다(롬 4:4).이상 인용된 성경구절들을 보면, 영생이, 사람이 자신의 선행에 의존하여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생명임을 시사하는 내용은 일절 없다. "일시적인" 영원한 생명이라는 교리는 있을 수 없으며 용어 자체도 모순임을 알 수 있다.
믿는 자의 구원이 절대 안전하고 확실하게 지속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구절들을 살펴보면 아주 인상적이다. 우리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기 위해서 거듭났으며",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다"(벧전 1:3-4). 이 확고부동한 약속을 주목하라: "또 미리 정하신 자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 현재 일이나 장래 일들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롬8:38-39).일단 우리가 주 예수님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받으면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보호의 손길에서 빼앗을 수 없다(요 10:28-29). "만일 양이 따르면" 혹은 "만일 그들이 자신을 그분의 손 안에 두면"라는 식의 조건이 일절 붙어져 있지 않다. 아무도 이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에 그러한 조건들을 첨가할 권리가 없다. 능력을 유지하는 것은 하나님께 있지 사람에게 있지 않다. 그분은 보호하실 수 있다(유 24). 그분은 끝까지 견고케 하실 수 있다(고전 1:8).그분은 지키실 수 있다(딤후 1:12). 그분은 온전히, 영원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 구원은 그것을 온전케 하시고 완전케 하시는 분이 우리의 전능하신 하나님이기에 영원한 것이다.

영원한 구원의 완성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분의 구원 사역을 상고해 보자(영어성경에는 "믿음의 기초자요 완성자"로 되어 있음, 히12:2).

1. 온전한 출생.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으로 태어날 때 그 구원은 영원한 것임에 틀림 없다. 주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시기를 사람이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셨다(요 3:3-7).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진정으로 믿을 때 거듭난다(요 1:12-13).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려면 거듭, 거듭 태어날 필요가 있음을 보여주는 가르침은 성경에 일절 없다. 육체적인 출생이 한번 일어나듯이 영적인 출생 또한 단 한번뿐인 것이다.

2.온전한 희생.
히브리서는 구약의 많은 제사들과 대조적으로 주 예수님의 십자가 상에서의 사역은 신자의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 준다는 것을 명백히 보여 준다. 이 사역은 온전하고 영원하고 "영 단번이며", 우리 편에서 아무것도 이에 추가할 수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히 10:10).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히 10:12).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히 10:14).
이 구절들에는, 이 완전한 사역이 유효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선행이 요구된다는 암시가 일절 없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만을 의존하며 그 외에 아무것도 추가될 수 없다.

3. 온전한 연합.
구원은 우리를 지역 교회의 일원이 되게 하지 못한다.그것은 우리를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몸 자체로,즉 하나님의 아들과의 연합으로 이끌어 준다.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연합시키며(고전 12:13), 우리를 그분의 지체가 되게 한다(고전 12:27; 엡 5:30). 이 연합은 매우 친밀하여 신자들을 핍박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것이다(행 9:4-5). 하나님의 심중에는 우리가 그분과 함께 살았고 그분과 함께 부활했고 현재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신바 돼 있는 정도로 그분과 동일시되어 있다(엡 2:4-6). 우리와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영적인 형태의 결혼관계로 결속돼 있다(롬 7:4; 엡 5:31-32). 아무것도 우리를 그분의 사랑과 보호로부터 떼어놓을 수 없다(롬 8:35-39). 그분은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히 13:5).

4. 성령의 완전한 사역.
구약 시대 및 복음서 시대 동안의 성령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의 성령의 현재의 사역과 차이가 있었다. 그 당시 성령은 사람들에게 임했다가는 다시 떠나갔다(삼 16:17). 다윗은 성령이 떠나갈 것을 두려워했다(시 51:11). 주 예수님은 성령을 받기 위해 기도하라고 독려하셨다(눅 11:13). 그러나 주님은 성령의 새롭고 다른 사역이 자신이 떠나간 후에 임할 것을 명백히 하셨다. 그분께서 영화를 얻으시기 전에는 성령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요 7:39). 성령은 후에 신자들 안에 영원히 가하기 위해 주예수님에 의해 주어질 예정이었다(요 14:16-17). 이것은 새로운 시대의 시작인 오순절 날에 실현되었다(행 1:4-5; 2:1-18,33).지금은 모든 참된 신자에게 성령이 주어져 있다(롬 8:9하). 우리가 진실로 복음 메세지를 믿을 때 우리는 우리의 구속을 보증하시는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다(엡 1:13-14; 4:30; 고후 1:22). 이러한 성령의 기름부음이 모든 참된 믿는 자 안에 머물러 있다(요 2:27). 이와 같이 모든 믿는 자는 하나님에 의해 인침을 받아 영원한 구속과 기업을 보증받는다.

5. 완전한 변호.
성경에는 죄를 범하거나 실패하지 않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주 예수님 외에 아무도 없다. 참된 신자가 죄를 범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확실히 그는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버릴 필요가 있다(잠 28:13; 요 1:9). 또한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한 대변자를 세울 필요가 있다. 주 예수님의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역할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변호자(문자적으로 "돕기 위해 곁에 있는 자)로 서시는 것이다. 이 역할 중에 그분은 아버지께 우리를 대신하여 변호하신다(요일 2:1). 그분은 항상 하나님 우편에 서셔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신다(롬 8:34; 히 9:24). 그분은 자신이 중재해 주는 자들을 영원히(혹은 완전히) 구원하실 수 있다(히 7:25-28). 이러한 변호가 우리의 선행에 의존한다는 언급은 일절 없다. 이러한 대변자를 가진 우리가 어떻게 하늘 법정에서 버림바 될 수 있겠는가?

6. 완전한 보존.
사람의 신실함에 의존한 모든 구원은 그 시작부터 실패할 운명을 지니고 있다. 우리의 육체란 심히 연약한 도구이다(롬 6:19). 비록 성령으로 시작했다 해도 도중에 육체가 개입되면 완전해질 수 없는 법이다(갈 3:3). 그러므로 우리 구주의 말씀을 다시 상기해 보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요 6:39-40). 주님은 우리 영혼을 지키는 자이시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끊임없이 강조된 사실이다(요 10:27-30; 고전 1:8; 빌 1:6; 유 24-25; 벧전 1:5). 이 구절들 중 어느 하나도 인간의 신실함에 의존할 것을 암시하고 있지 않다.

영원한 구원에 대한 의문들

많은 경건한 신자들이 영원한 구원의 교리를 받아들이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이해할 만 하다. 그들의 의문은 다음 세가지 일반적인 주제로 집약된다.

1."구원받은 자들"의 실족.
어떤 사람들은 과거에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한 일부 신자들이 도덕적으로 실패하고, 하나님을 떠나고,심지어는 주님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상태로까지 전락하는 모습을 근거로 구원은 필경 조건적이라고 주장한다. 만일 사람들이 옛 생활로 돌아간다면, 혹은 그들이 배반한다면 어떻게 그들이 구원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 질문에 답변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모든 이들이 정말 구원받은 자인가를 물어보아야 한다. 신약성경은 아무 생명 없이 그리스도를 고백할 가능성이 있음을 밝히 보여 준다. 예수님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자라는 비유를 말씀하셨다(마 13:24-30, 36-42). 가라지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들이 아니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죄악된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것은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운 것에 비유된다(벧후 2:20-22). 개와 돼지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의 양떼로 바뀔 수 없는 까닭에 본성적인 습관으로 되돌아 간 것이었다. 다가올 날 주 예수님은 그들의 행위를 의지하여 그분과의 관계를 주장하며 그분께로 나아오는 자들을 거절하실 것이다. 그분은 "나는 너희들을 도무지 알지 못하노니 나를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마 7:23). 그분께서 "너희는 과거에 나를 알았었으나 후에 나를 떠나갔도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구원의 믿음과 의사(가짜라는 뜻) 믿음은 다르다. 어린 시절의 기도, 결신을 표한 손, 교회 집회를 향한 발 걸음, 세례를 비롯한 각종 교회 의식에의 참여 등은 구원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 영원히 안전하면서도 참된 구원을 가져다 주는 것은 단순한 입술의 고백이 아니다! 부도덕함, 다툼, 분노, 술취함, 시기 등과 같은 습관적인 죄들은 경고의 표징들이다.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갈 5:19-21). 요한일서 2장 3-6절, 3장 6-10, 14절, 5장 2-4절 등에는 구원의 믿음의 진실성 여부를 알 수 있는 확실한 지침이 담겨 있다. 만일 우리가 주 예수님과 그분의 말씀에 복종하지 않는다면, 만일 우리가 죄를 범한다면, 만일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가 그분을 아노라고 헛되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짓말장이라고 말씀하시며(요일 1:6; 2:4), 우리에게는 아무런 중생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2. 방종하여 죄에 빠짐.
"어떤 사람들은 만일 사람들이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는다면 그들은 영적으로 방종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그렇게 되면 그들은 "원하는 모든 죄"를 자유롭게 범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본 교리를 대단히 잘못 이해하고 잘못 제시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참된 양은 주인을 따르기를 원하지 그분의 사랑과 은혜를 이용하려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녀는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릇 행하는 자녀들을 다루는 방법을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그 한 가지 방법이 주님의 징계 혹은 "징벌"이다(히 12:5-11). 교정은 하나님의 가족에서 제외되는 것과는 다르다. 또한 하나님은 방황하는 자녀들을, 기쁨과 평안, 증거 능력, 기도의 능력과 결실 및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의 상급 등을 빼앗기도록 허락하심으로써 다루신다. 그리스도의 어떤 양도 제 멋대로 사는데 만족하도록 방치되지 않는 것이다.

3. 영원한 구원과 "상충되는"성경구절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가르침과 모순되어 보이는 성경구절들을 인용함으로써 영원한 구원의 교리를 논박하고자 한다. 그러나 교리란 성경전체에 입각한 것이지 어던 부분을 근거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구절들이 적절히 조화되는 한 서로 모순되게 발견되지 않는다. 과거에 그리스도인들로 알려진 사람들이 후에 타락하여 그들의 구원을 상실한 것으로 가르치는 듯이 보이는 많은 구절들은 자세히 관찰되어야 한다. 그러면 영원한 구원의 교리와 상충되는 듯 보이는 대표적인 구절들을 살펴보자.

1) "타락함". "타락한"사람들을 가리키는 구절들이 때때로, 참 신자들이 그들의 구원을 잃을 수 있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곤 한다. 그러나 "타락"(apostasia)이란 말은 우선적으로 과거에 그리스도인으로 고백한 자들의 믿음에 결함이 있음을 가리킨다. 특별히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오직 그분이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피를 통해서만 가능한 구속을 부인하는 해위를 포함한다. 그러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반드시 교회를 떠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남아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교사 행세를 한다. "저희가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요일 2:19). 유다서는 그러한 사람들을 매우 잘 묘사한 관계로 "변절자들의 행전"이라고 불리운다. 그러한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사이 슬며시 침투한다. 그들은 "경건치 아니하며"(4절), 물 없는 구름이며(12절), "성령이 없는"자들이다(19절). 그들은 비록 "경건의 모양"은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참 신자들이 아니다(딤후 3:5). 그러한 사람들에 대한 묘사는 디모데전서 4장 1-3절, 베드로후서 2장 1,15-22절, 요한일서 2장 18-22절 및 요한이서 7-9절 등에도 나와 있다. 은혜에서 떨어진 자들(갈 5:4), 그리스도를 향한 첫 사랑에서 떨어진 자들(계 2:4-5), 견고함에서 떨어진 자들(벧후 ;3:17) 등을 묘사할 때는 "아포스타시아"가 아닌 다른 단어가 사용되었다.

2) 조건적인 문장들. 많은 성경구절들이 "만일"이라는 접속사를 붙인 채 구원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만일"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구원이 일정한 방식의 삶을 지속할 때만 유지된다는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오히려, 성경의 표준에 일치되지 않는 삶을 보여 주는 구원은 우선적으로 참된 구원이 아니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히브리서는 참된 구원 여부를 묻는 많은 조건문들을 담고 있다. 이 책은 중생한 신자들과 중생하지 못한 채 요동하는 자들의 두 부류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유대인 무리에게 씌어진 것이다. 후자는 유일한 근거인 그리스도의 피를 저버리고 성전 제사를 되돌아 갈 위험에 처해 있었다. 중생을 가져오게 하지 못할 예수님에 대한 희미한 소망을 하시라도 저버릴 준비가 된 요동하는 자들에게 여러 경고들이 주어졌다(2:1-3; 3:6,12,14; 4:1; 12:25). 이 외에 그린도전서 15장 1-2절, 골로새서 1장 22-23절 등 여러 구절들이 그리스도께 대한 지속적인 의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히브리서 6장 4-6절은 많은 사람들을 혼란케 한다. 만일 여기서 두가지 요소만 없다면 이 구절은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말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성령의 인침, 혹은 내주하심에 대한 언급은 없고, 구원은 받지 않은 채 행하는 자들에게 해당할 수 있는 성령의 사역에의 참여만이 언급돼 있을 뿐이다(4절). 게다가 9절에는 "너희에게는 이보다 나은 것과 구원에 가까운 것을 확신하노라"라고 되어 있는데 이는 앞의 표현들이 참 신자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 만일 이 구절이 양이 버림받을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근거 구절이라면 그것은 너무 지나친 논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사람이 한번 타락하면 다시는 회개하여 새롭게 될 수 없다고 못박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적된 잘못은 구원의 유일한 근거인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에서 떨어져나가는 것이다. 이는 다른 일반 잘못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또 하나의 심각한 경고는 "짐짓(고의적으로) 죄를 범한"사람들을 다룬 히브리서 10장 26-39절이다. 26절과 39절을 비교해 볼 때 우리는 각각의 주어 "우리"가 서로 다름을 알 수 있다. 26절의 고의적인 범죄자는 유일한 열납될 만한 제사를 저버리고 "하나님의 아들을 밟았다"(29절). 이와 대조되는 무리가 39절에 나와 있다.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참 신자들은 그들의 유일한 소망인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 물러서지 않는다. 구원의 믿음은 영속적이다.

3) 여러 비유들. 때때로 어떤 비유들은 실험적인 구원의 교리를 지지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적절한 성경해석은, 비유는 비유 전체의 기르침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할 것을 요구한다. 실험적인 구원을 가르치는데 흔히 사용되는 비유는 다음 네 가지이다.

(1) 씨 뿌리는 자의 비유(눅 8:4-15).

의문: "잠시 믿는"자들이 있다.
해설: 그들은 뿌리가 없다고 기록돼 있다. 그렇다면 그들이 믿었다는 말씀은 어떻게 된 것인가? 귀신들도 믿지만 그들은 구원받지 않은 상태이다(약 2:19). 이 비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들의 마음 상태를 다루고 있다. 정직하고 선한 마음으로 듣고 믿는 자들은 구원을 받고 그 결과인 열매를 맺는다.

(2) 청지기 비유(눅 12:41-48).

의문: 신실치 않은 청지기는 주인의 귀환을 기다리지 않다가 "신실치 아니한(믿지 아니하는) 자의 받는 율에 처하였다."
해설: 모든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의 청지기이다. 여기에는 신실치 않은 자가 구원을 잃어버린 신자라는 암시가 일절 없다.

(3) 용서의 규례(마 18:23-35).

의문: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그리고 악한 종은 "옥졸들"에게 넘겨졌다.
해설: 여기에는 용서하지 않은 사람이 구원받은 자라는 아무런 암시도 없다. 본문의 일반적인 교훈은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공정하라는 것이다.

(4) 참 포도나무(요 15:1-7).

의문: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해설: 본문의 주제는 그리스도와의 지속적인 사귐을 필요로 하는, 과실을 맺는 일이다. 밭에서 흔히 행해지는, 사람들에 의해 열매없는 가지들이 불살라지는 것은 버림받은 자들에 대한 영원한 심판의 불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4) 기타구절들. 파선된 믿음(딤전 1:19-20), 떨어져 나간 믿음(딤전 6:10,21), 무너진 믿음(딤후 2:18)을 말씀하는 구절들이 종종 영원한 구원을 반박하는데 사용된다. 그러나 이 구절들은 실족한 신자들과 거짓 고백자들 모두를 포함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주님은 자기 백성을 알고 계신다"(딤후 2:19). 종종 우리는 생활의 변화 여부가 불확실한 관계로 다른 사람의 구원 여부를 확실히 알 수 없다. 한 예로 창세기의 설명으로부터는 롯의 구원 여부를 알 수 없지만 베드로후서 2장 7-9절을 읽어보면 그가 구원받은 자인 것을 알 수 있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서 그들의 상급을 잃어버린 채 불 가운데에서 건짐받은 것 같이 겨우 구원을 받을 수도 있다(고전 3:15). 사도 바울이 "버림받을" 혹은 자격을 잃어버릴 위험을 언급한 것은 필경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고전 9:27).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구원을 잃어버릴 것을 염려했다는 의미가 아니다.그는 자신의 구원에 대해서 확신이 있었다(딤후 1:12; 4:7-8).

결론

성경은, 구원의 믿음은 일평생 지속되며 단순한 순간적인 행동이 아님을 밝히 보여 준다. 구원의 믿음은 피상적인 믿음이나 어떤 교리에 대한 지적인 동의나 결신 기도를 비롯한 여러 외적인 표현들과는 다르다. 참된 믿음은 결코 그리스도와, 인간의 유일한 소망인 그분의 구원사역을 저버리지 않는다. 그것은 죄악된 생활이 아닌 선한 생활을 가져온다. 구원받은 사람은 스스로 믿음이 있다고 고백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통해서 믿음의 실제성을 입증해 보이는 사람이다(약 2:14-24). 이러한 실제성이 없이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은 "천국 소망"을 확신할 수 없다. 그 대신에 그는 다가오는 날에 주님 앞에서 "나를 떠나가라. 나는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두려운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그리스도의 참된 양떼들은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딤후 4: 18하)라고 고백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