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편] 7강 시험의 극복

2019년 May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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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과 시험의 극복"

도덕적인 영역에 있어서 인간의 공통적인 경험 가운데 하나는 우리가 잘못이라고 알고 있는 일을 행하는 쪽으로 우리 마음이 강하게 끌리거나 사로잡히는 것을 우리 스스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는 성공적으로 저항하는가 하면 종종 굴복을 한다. 이같이 잘못을 행하도록 유도,혹은 자극하는 것을 "시험"(temptation)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시험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감지하고 저항할 수 있는 힘을 소유했느냐 여부는 신자로서의 우리의 성장에 크나큰 영향을 미친다.시험은 실패, 혹은 승리의 생활을 초래한다.

시험의 의미

성경의 용례를 볼 때 시험은 두가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1. 시련(testing), 혹은 입증(proving).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믿음의 어떠함을 실험해 보시는 것이다(창 22:1; 출 15:25; 16:4).믿음의 시련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바치라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과 같이 직접적일 수도 있고,삶의 어려움과 핍박들 같이 간접적일 수도 있다(약 1:2-3; 벧전 1:6; 4:12). 시험은 하나님께 어떤 정보를 알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의 실제성을 입증해 보이기 위한 것이다.

2.도전(challenging), 혹은 격동(provoking).
이것은 부정적인 용례로서 인간이 하나님의 반응 여하를 실험해 보는 것이다(출 17:7; 행 15:10; 고전 10:9; 히 3:8). 종종 인간은 그분의 사랑과 능력에 대해서 의심을 나타냄으로써, 그분의 손길을 강요하기 위한 의도로 비성경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그분의 은혜를 빙자해 거듭 그분을 거역함으로써 하나님을 시험한다. 이러한 행동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 일으킬 수 있다(시 106:29; 사 5:25). 그분은 또한, 때때로, 사단이 신자들을 시험하거나 괴롭히도록 허락하신다(욥 1:12; 2:3-6).

3. 유인(enticement), 혹은 유혹(allurement).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잘못된 일을 하는 것으로 가장 보편적인 의미의 시험이다(약 1:14; 갈 6:1; 딤전 6:9; 살전 3:5). 본과에서 다루고자 하는 시험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비록 사단이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시기는 해도 결코 이런 방법으로 사람을 직접 시험하지는 않으신다(약 1:13). 시편 기자가 하나님께 자신을 시험하고 마음에 악한행위가 있는지 살펴달라고 간청했을 때 그것은 첫번째 의미의 시험을 난타낸 듯 보인다(시 139:23). 주 예수님께서 천사들이 구해줄 것이니 한번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보라는 요구를 받고 하나님을 시험하기를 거절했을 때 그것은 두번째 의미의 시험을 나타낸 것이다(눅 4:12). 이른바 주기도문에는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하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이것은 분명 세번째 의미의 시험을 나타낸 예이다(마 6:13). "시험"이란 단어의 이 세가지 용례는 주의깊게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우 격려가 되게도 다음과 같은 약속을 주고 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 그리고 인간의 행복을 위해서 시험을 사용하신다. 그것을 통해서 그분은 믿음과 정직을 드러내시고, 인내와 같은 인격적인 자질들을 발전시키고, 종종 그분의 대적들의 입을 막으십니다.

유혹의 세가지 근원

유혹은 세가지 근원에서 온다.그 세가지를 혼동하거나 빠져들지도 모를 어느 한 영역을 간과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마귀
마귀는 하나님을 좇는 길로부터 사람을 유인, 유혹해 내는 인격적이고 활동적인 악의 대리인이다. 그는 시험하는 자로 불리운다(마 4:3; 살전 3:5). "마귀"(devil)란 단어는 "참소자", 혹은 "고소자"란 뜻이다. 그는 하나님을 사람에게 참소하며(창 3:5), 사람을 하나님께 참소한다(계 12:10). "사단"(satan)이란 말은 "대적", 혹은 "원수"란 뜻인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과 사람의 원수이기 때문이다(벧전 5:8). 이 악의 기원은 에스겔 28장 12-19절과 이사야 14:12-14절에 제시돼 있다.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의심을 던짐으로써(창 3:1), 사람을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압박함으로써(행 10:38), 그리고 "파괴자"란 뜻을 지닌 아볼루온, 혹은 아바돈이란 이름에 걸맞는 파멸의 길을 남김으로써(계 9:11) 활동을 한다. 이 치명적인 활동은 인간에게 그 영혼을 잃게 하는 영향을 미칠 수 있다(요 8:44).

세상
세상은 하나님을 저버리고 그 영역으로 들어오도록 유도하는 일체의 불경건하고 유혹적인 영향력들을 가리킨다. 여기서 말하는 세상과, 지구, 혹은 그 거민을 뜻하는 세상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악한 세상조직은 사단을 그 왕, 혹은 지도자로 모시고 있다(요 12:31; 엡 2:2). 이 조직은 엄마 품의 아기와 같이 사단의 보호 안에 있다(요일 5:19). 세상과 벗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다(약 4:4). 신자들은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의미에서 그 안에 있지만(요 13:1), 그 속에 참여하거나 동화되지 않는 까닭에 그것에 속해 있지는 않다(요 15:19). 거듭난 사람들은 세상을 이겼노라고 선포되어 있다(요일 5:4).

육신
육신은 성경에서 세가지 다른 면으로 표현되어 있다. 즉, 인류 전체를 가리키기도 하고(행 2:17), 인간의 몸을 가리키기도 하고(요 1:14; 3:6; 6:51), 하나님이 정하신 적절한 한계를 벗어난 탐심이나 정욕을 가리키기도 한다(갈 5:16,24; 약 1:14; 엡 2:3). 물론 여기서 말하는 육신은 세번째이다. 육신이 지배할 때 우리의 본능은 적절한 한계를 뛰어넘게 된다. 예를 들어 성생활은 결혼관계 안에서는 합법적이지만 그 관계 밖에서는 음행이 되고 만다. 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먹는 음식도 지나치면 비만을 초래하는 폭식이 되고 만다. 육신의 행위는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 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 등으로 묘사된다(갈 5:19-20). 이러한 행위 가운데 지속적으로 머무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자들의 증표이다(갈 5:21).

두가지 성품-육신과 성령의 싸움

그리스도 안의 신자는 옳은 것을 하고자 하는 소원과 나쁜 것을 하도록 유혹하는 욕망 사이의, 종종 치열한 개인적인 싸움을 깊이 인식한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갈 5:17).

신자는 구원은 받았으나 그러나 불행히도 그의 본성은 그렇지 않다. 본성은 새로운 출생에 의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다. "본성"(nature)은 어떤 것을 행하려는 경향, 기호, 성격, 혹은 능력을 말한다. 마치 개가 짖기를 좋아하듯이 죄를 몹시 탐하는 옛 성품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나온 것이다. 그것은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다(롬 5:12). 본성적으로 인간은 육체와 마음의 정욕대로 탐닉하고자 하는 경향이 있다(엡 2:3). 때때로 이 본성은 "옛 사람"(엡 4:22; 골 3:9), 혹은 "육신의 생각"(롬 8:7)으로 불리운다. 이 본성은 악의 근원이다(막 7:21-23). 그것은 죄 중에 처해 있다(시 51:5). 그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롬 8:7-8). 그것으로부터는 어떤 선한 것도 나올 수 없다(롬 7:18). 우리는 거듭날 때 옛 성품의 갱생이 아닌 새로운 생명을 받는다(벧전 1:4). 우리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5:17)과 "새 사람"(엡 4:24)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께로부터 왔기 때문에 죄를 범할 수 없는 거룩한 씨가 심겨져 있다(요일 3:9). 옛 성품은 제거되지도,개선되지도 않으므로 로마서 7장 15-23절에 개관돼 있듯이 두 성품 사이에는 인식 가능한 싸움이 존재한다. 새 성품은 옛 성품을 지배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모든 면에서 새 성품을 키우는 반면 어떤 형태든 옛 성품을 무력화시켜야 한다. 사도 바울은 자기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고전 9:27) 이것은 자기 훈련을 가리켜 말한 표현이다.

유혹의 두가지 양상

최초의 인간들이 받은 유혹은 인간이 당하는 유혹의 세가지 통로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이다. 요한일서 2장 16절을 참조하라. 시험하는 자가 금단의 열매를 이브의 눈 앞에 제시했을 때 그것은 "먹음직도 하고"(육신의 정욕), "보암직도 하고"(안목,혹은 세상의 정욕), 그리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럽기도"(이생의 자랑) 했다(창 3:6).
주 예수님이 받은 시험도 이와 유사하다. 첫째로 그분은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받았는데 이것은 육신에 대한 호소이다(마 4:3). 그 다음에는 천사들이 구해줄테니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시험을 받았는데 이것은 이생의 자랑에 호소한 것이다(마 4:5-6). 끝으로 사단에게 경배를 하면 그 보상으로 세상과 그 모든 영광을 주겠노라는 시험을 받았는데 이것은 안목,혹은 세상의 정욕에 호소한 것이다(마 4:8).

유혹에 대한 승리-하나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정복하신 것 외에 어떤 시험도 인간에게 닥치지 않는다.그분은 그렇게 하여 우리의 승리를 위한 기초를 닦아 놓으셨다.

사단의 패배
주 예수님에 의해 십자가 상에서 사단이 패배를 하고 말았다(요 12:31; 16:11). 신자들에 대한 사단의 권세가 무너졌다(골 2:15; 히 2:14). 성경은 우리에게 마귀를 두려워하라는 경고를 일절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그를 대적하면 그가 도망갈 것이라는 권면을 받고 있다(약 4:7). 만일 그가 아직도 신자에 대한 권세를 가지고 있다면 분명히 그는 도망가지 않으려 할 것이다. 한편 우리는 그는 영악스럽게 그것을 이용할 것이므로 그에게 일할 기회를 주지 말라는 경고를 받고 있다(엡 4:27). 그러나 그가 비록 신자들을 유혹하고 속이고 공격할 수는 있지만 우리는 주 예수님의 피를 의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를 무리칠 수 있는 것이다(계 12:10-11).

세상의 패배
우리 주님에 의해 세상의 패배라는 또 하나의 성취가 이루어졌다. 그분은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하셨다(요 16:33). 그분은 철저히 세상을 정죄하셨다(요 12:31; 고전 11:32). 이러한 까닭에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도덕적으로 떨어져 있어야만 한다(고후 6:14-17).이것은 우리 자신을 불신자들로부터 격리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마 11:19). 그것은 부정함과 타협과 부조화한 관계를 피하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사랑할 것이 아니라(요일 2:15), 믿음으로 세상을 이겨야 한다(요일 5:4).

육신의 패배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그 권세를 깨뜨리심으로써 육신은 완전히 패배하였다(롬 6:6). 거기에서 그분은 육신에 죄를 정하셨다(롬 8:3). 우리는 전에는 죄의 노예였으나 이제는 해방되었다(롬 6:20-22). 그리스도께서는 신자에게 있어 죄에 대한 "이중적 치료"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죄의 책임 및 죄의 권세로부터 구원하셨다. 우리는 불가항력적인 정욕의 무기력한 희생물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를 죄로 이끄는 육신의 소욕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님의 병기가 주어져 있다.

유혹에 대한 승리-우리가 해야할 일

우리 주님에 의한 승리의 대안은 언제나 개인적인 무장을 필요로 한다. 따라서 원수들은 공격하기를 멈추지 않는다.모든 시험에는 피할 길이 마련돼 있다(고전 10:13). 육신의 연약함을 인식하고 기도로써 시험에 대비하는 것은 언제나 바람직한 자세이다(마 26:41). 우리는 시험을 이기기 위해 성령의 유효한 능력을 힘입을 필요가 있다. 현명한 행동은 어떤 유혹들을 피하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고전 7:5).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의지하는 것은 위험한 자세이며 마땅히 피해야 한다(빌 3:3). 성경은 우리를 위해서 승리의 길을 예비해 두셨다.

여기라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지어다"(롬 6:11). 우리의 마음은, 우리가 우리의 크신 구속주이신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으며, 옛 생활과 관련된 모든 것은 그곳에서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것을 깨닫도록 올바르게 조정되어야 한다. 죽은 사람은 죄에 이끌리지 않는다.

드리라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신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우리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리라는 권면을 받고 있다(롬 12:1). 그러면 성령의 강이 그것의 지배를 받는 삶을 통해 흘러 나온다(요 7:38-39).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7).

대적하라
우리는 사단을 대적하라는 권면을 받고 있다(약 4:7). 우리는 기도해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해야 한다(마 4:1-11). 우리의 참전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영적 전쟁 또한, 우리의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 만큼이나 승리의 생활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승리의 생활에는 능동적인 대책과 수동적인 대책 모두가 사용되어야 한다.

실패에 대한 대책

그리스도의 도우심을 구하라
그리스도인은 죄를 덜 지을 수는 있지만 전혀 죄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 2:1)고 한다. 그리고 다음 구절에서는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과거, 현재, 미래에 걸친 우리의 모든 죄를 위해 죽으심으로써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음을 보여준다. 이제 예수님께서 우리가 죄를 범할 때 아버지 앞에서 우리의 처지를 대변하시는 우리의 변호자요, 대언자이시다.

하나님께 자백하라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교제는 우리 죄를 자백함으로써 회복된다(요일 1:9)."자백하다"는 단어는 "동의하다"는 의미이다.우리가 죄를 자백할 때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이 잘못이라는 점에 대해 하나님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단순히 우리가 죄를 범한 사실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으며 반드시 우리가 실제로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를 명백히 밝혀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라
하나님의 완전한 용서와 사하심을 받아들이라.일단 죄가 인정되고 버려졌는데도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분을 거짓말장이로 여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분은 그러한 조건을 갖추면 반드시 용서하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지난 죄를 생각하는 것은 침체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결론

유혹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임하는 일상사와 같은 실제적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 세상 조직 및 육신의 세가지 가공할 적들을 직면하고 있다. 그러나 불구하고 주 예수님은 빛 가운데 행하고, 승리의 생활을 하고, 과실을 풍성히 맺고, 변화된 삶을 드러내도록 우리를 어둠에서 불러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대적을 패배시키고 우리의 구원의 주(혹은 대장, Captain)가 되심으로써 그러한 일을 가능케 하셨다(히 2:10). 우리의 대장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승리 가운데 이끄시며, 우리를 통해 각처에 "그분을 아는 지식의 향기"를 전파하기를 원하신다(고후 2:14). 더더욱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적인 전투의 크나큰 도전들을 물리칠 수 있는 네가지 값진 원동력을 주셨는데, 그것은 우리 안에 살아계신 성령과(롬 8:9,10),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중재하고 계신 그리스도 자신과(히 7:25), 우리를 양육시키고 우리를 위해 싸우는 하나님의 말씀과(엡 6:17), 그리고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통로가 되어주는 기도(히 4:16)이다.
이와 같은 위대한 지도자와 큰 원동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영적인 승리를 얻으려면 우리는 반드시 진리를 좇고 순종해야 한다. 영적인 승리는 성경의 사실에 대한 단순한 지적인 이해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지시를 떠난 어떤 주관적인 영적 경험에 그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예수님을 "주"로 부르며 그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행할 아무런 책임을 느끼지 않는 것은 최악의 경우에는 거짓 고백이요, 최선의 경우에는 위선이다(눅 6;46). 순종은 영적인 실제성(요일 2:3-4)과 주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요 14:15-21)을 시험하는 시금석이자 영적인 성장의 지름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