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미지근한 교회
본 문: 요한계시록 3장 14-22절
설교자: 조 성 훈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에서 동쪽으로 약 60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고, 아시아 지역의 다른 교회들처럼 사도 바울의 사역으로 복음을 들은 사람들에 의해서 세워졌다고 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교회들은 각각 특징이 있습니다. 처음 사랑을 잊은 교회, 살았다고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교회,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신앙에 굳게 서서 그리스도를 세상에 전파하는 교회 등이 그렇습니다. 여기 본문 말씀의 라오디게아 교회는 미지근한 교회라고 했습니다.
저자에 대한 소개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아멘이시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가 가라사대(14)”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진리’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이 자신을 진리라고 소개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앞에 숨겨졌음이니라(사 65:16)” ‘진리의 하나님’은 ‘아멘이신 하나님’과 같은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은 자신을 가리켜 “충성되고 참된 증인”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이 땅에 보내셔서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게 하신 충성된 증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서, 또한 인간의 운명과 하늘나라에 대해서 증거하셨습니다. 주님이 없었다면 우리는 내세와 인간의 진정한 운명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을 것입니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요 3:12-13)” 이 세상에는 거짓이 가득 차 있습니다. 우리가 듣는 정보의 90% 이상이 거짓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과장되게 포장해서 말하는 것이 얼마나 많습니까. 정직하고 순진한 사람이 살아가기 참 힘든 세상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에게 참 진리를 증거해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주님은 창조의 근본이시고 하나님 자체이십니다.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5-17)”
교회에 대한 평가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15)” 이 말씀은 그들이 믿는 자 같기도 하고 안 믿는 자 같기도 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17)” 17절 말씀 역시 믿지 않는 자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련한 자도 아니고 눈 먼 자들도 아닙니다. 이것은 불신자에 대한 전형적인 표현입니다. 자신은 부자이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을 부족한 자, 가련한 자, 눈 먼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거듭나지 않은 자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스스로 부족한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 안의 교인들을 보면 많은 사람들이 믿는 자들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이 보시기에는 그런 자들이 모두 벌거벗은 자들입니다.
교회에 대한 권고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 자신이 무엇을 말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시고 어떻게 말씀하시느냐가 중요합니다. “내게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것은 주님을 소유하라는 의미입니다. 주님을 소유한 사람은 가장 부한 사람이 되는 것이요, 주님이 없는 사람은 가장 가난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은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으로 옷 입고 있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사람은 마치 벌거벗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를 아실 것입니다. 자신은 멋진 옷을 입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벌거벗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행함으로 구원받을 수는 없습니다. 의로운 일을 해서 옷을 입더라도 그것은 더러운 옷입니다. 깨끗한 흰 옷은 예수님으로만 입을 수 있습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바르라”는 것은 영적인 장님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누가 눈 먼 사람인지는 어떤 물건을 보여주고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구원받지 못한 사람도 대화를 해보면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눠보면 누가 영적인 장님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19)” 그들을 권고하시며 책망하시는 이유는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승리자에 대한 약속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 믿지 않는 자들에게 주님은 문 밖에 서서 마음의 문을 두드리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사람은 문 앞에 주님을 세워두고 오래도록 열어주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이 떠나가신 것입니다. 아무도 주님이 찾아오지 않으셨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마음 가운데 영접한 사람입니다. 그 이후에는 주님과의 동행이 시작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우리처럼 매 주일 모여서 떡도 떼고 예배도 드리고 여러 교회활동들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고 찬양도 하고 열심히 참여했지만, 세상을 떠났을 때 무서운 진노가 기다리고 있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우리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결론
때로 네비게이션을 장착하고 있어도 길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네비게이션의 안내자는 목적지에 도착했다고 하지만 전혀 엉뚱한 곳에 와 있을 때가 있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와서 찬양하고 예배를 드린 사람이 지옥에 간다면 어떨까요.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처럼 자신이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복음을 수없이 많이 들었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알지만 이론적으로 아는 것일 뿐 삶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가지고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나는 옷을 입고 있고 눈을 뜨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주님 보시기에 곤고하고 눈 멀고 가련한 것입니다.
내가 복음을 머리로만 알고 있고 입으로만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은지 자신을 점검해봐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서 진정으로 부한 자가 되었는가, 내 안에 생명이 있는가,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고 있는가를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주님의 오심이 가까워올수록 자신이 믿음에 굳게 서 있는가를 스스로 점검해 봐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