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뢰아 사람들

2009년 January 18일 ()

본문: 사도행전 17:1-15 |

주 제: 베뢰아 사람들

 

본 문: 사도행전 17장 1-15절

 

설교자: 조 성 훈

 

“저희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로 다녀가 데살로니가에 이르니 거기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지라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 그 중에 어떤 사람 곧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 않은 귀 부인도 권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좇으나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하여 저자의 어떤 괴악한 사람들을 데리고 떼를 지어 성을 소동케 하여 야손의 집에 달려들어 저희를 백성에게 끌어 내려고 찾았으나 발견치 못하매 야손과 및 형제를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질러 가로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야손이 들였도다 이 사람들이 다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여 말하되 다른 임금 곧 예수라 하는 이가 있다 하더이다 하니 무리와 읍장들이 이 말을 듣고 소동하여 야손과 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를 받고 놓으니라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저희가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이 하나님 말씀을 베뢰아에서도 전하는 줄을 알고 거기도 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거늘 형제들이 곧 바울을 내어 보내어 바다까지 가게 하되 실라와 디모데는 아직 거기 유하더라 바울을 인도하는 사람들이 데리고 아덴까지 이르러 바울에게서 실라와 디모데를 자기에게로 속히 오게 하라는 명을 받고 떠나니라”

 

본문 말씀에는 유대인들과 베뢰아 사람들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은 진리를 막는데 평생의 삶을 투자하며 살고, 어떤 사람은 진리를 받아서 그 안에서 자유함을 누리며 삽니다.

 

사도 바울의 전도와 반응

 

사도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그들은 복음을 받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나오지 못한 것은 하나는 그들의 고정관념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시기심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에게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장로의 유전과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은 굉장히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아주 작은 것이라도 변화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고정관념 속에 갇혀 있어서 작은 변화라도 마치 큰 진리를 바꾸는 것처럼 여기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경을 가지고 유대인들에게 그리스도가 메시아라는 것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오랫동안 그들이 가르침 받아온 율법과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성경을 제대로 알고 있었던 사람은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증거하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도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은 싫어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행 13:46)”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이유 중 하나는 유대인들에게 시기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롬 11:11, 14).

 

반대자들의 자세

 

유대인들은 시기심이 발동했습니다(5). 사람들에게 있는 죄의 속성 중 하나는 시기심입니다. 어떤 사람이 나보다 더 잘 살고 잘 되면 시기심이 나게 마련입니다. 유대인들 역시 그러해서 수천 년 동안 기다려온 메시아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셨는데 그것을 시기심 때문에 거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잘못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렸으며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말씀을 저같이 잘 전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시기한 것은 자신들이 일할 때는 사람들이 그렇게 따르질 않았는데 예수님께로 사람들이 모이자 시기심이 난 것입니다.

 

교회 안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나보다 더 못 배운 사람 같은데 교회에서 쓰임 받고 나보다 늦게 들어왔는데 나보다 앞서는 것 같을 때 시기심을 가집니다. 유대인들도 시기심 때문에 그들을 배척하고 방해했습니다. 그 시기심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복된 소식을 듣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우리가 늘 알고 생활해오던 것에서 약간만 벗어나면 마음속에 평안이 없습니다. 변화를 싫어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종교생활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교회에서 주기도문을 외우지 않는다고 이단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이상하게 여긴 것입니다. 양이나 소가 안식일에 물에 빠져 죽어 가면 살리지 않습니까. 그들은 상식 이하의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더운 여름 안식일에 버튼을 잘못 눌러 보일러를 돌렸다면 다시 스위치를 끄지 않습니다. 그것이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이 시작되기 전에 촛불을 켜 두지만 밤에 잠자리에서 들 때는 촛불을 끌 수 없습니다. 그것 역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아이들을 그 앞에서 소리내어 책을 읽도록 시키고 아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바람으로 촛불을 끈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고 외식적입니까. 주님은 진실을 보라고 몇 번을 말씀하셨지만 그들은 자신이 해오던 것들과 다른 것에는 일체 마음을 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의 교인들도 교단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것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단의 가르침, 인간들의 회칙에 어긋나면 그것이 진리라 할지라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사람들을 선동하곤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의 자세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 ‘신사적’라는 말은 공정한 사람, 편견이 없는 사람, 다른 사람의 말도 긍정적인 입장에서 들을 줄 아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어떤 말이든지 받을 때에 간절한 마음으로 듣고 그것이 과연 그러한가 하고 성경을 상고했다는 것입니다.

 

수년 만에 만난 어떤 형제와 교제하는데 그는 제가 번역한 그리스도인의 4단계 공과가 어떻게 잘못되어 있는지를 한참동안 말했습니다. 30분 정도 말한 뒤에 이제 내 차례가 되어 그것에 대해 말하려고 하니까 이제 그만하자고 했습니다. 이것은 신사적인 자세가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사도 바울의 말을 듣고 과연 그러한가 하고 성경을 살펴본 것이 아니라, 듣는 순간부터 시기심이 발동해서 그 말을 들으려고 하지도 않고 어떻게 하면 이것을 반박할까 하는 생각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일단 하나를 믿고 있으면 다른 것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율법과 장로들의 유전에 빠져있었던 유대인들도 그러했던 것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신사적이었습니다. 자신의 주장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주장도 들어보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성경을 근거로 하여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조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반대합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마음에 평안이 없다”고 합니다. 무엇을 듣든 마음에 평안이 없으면 성령이 동의하지 않는 것이고 그것은 진리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이라는 것은 중립적인 자세에 있지 않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는 것, 이것이 우리에게 큰 변화를 가져오는 것입니다. 거기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펴서 그것이 맞는가 아닌가 하고 살펴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믿으면 그 사람이 한 말을 다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런 사람만이 악한 세대에서 진리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교단과 가르침에 근거해서 평가하지만, 모든 판단의 근거는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과 같은 자세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들은 지금껏 배워온 가르침이나 자신의 고정관념과 비교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과의 비교를 통해서 그것이 사실이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 가르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다른 교회에 속한 사람이든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하나님의 진리를 증거 한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교회는 하나이고 하나님 앞에서 교단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구원받은 사람은 다 하나님의 자녀이고 성경에서 가르치는 교훈과 가르침은 교단을 떠나서 온 우주에 미치는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에 이 말씀에 근거해서 신앙을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하나님을 위한 싸움

 

유대인들이 모두 시기심 때문에 망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가 되기 전의 사도 바울은 자신이 배운 것들이 진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이 증거한 것이 잘못되었다고 여기고 그들을 핍박한 것입니다. 그의 열정은 순수한 것이었고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잘못된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기심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습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딤전 1:13)”

 

결론

 

우리는 어떤 일을 판단할 때 그것이 나의 시기심에서 온 것인지 아닌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이 지금까지 내가 가르침 받아온 고정관념 때문인지 아닌지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늘 성경도 그러한가 하고 살펴보는 자세를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자신이 존경하고 좋아하는 사람으로부터 잘못된 가르침을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에게 좋은 선교사들이 많지만 그들이 전해준 것이 다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자신의 개인적인 깨달음에 의한 가르침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이 그러한가 하고 성경을 상고하면서 올바른 가르침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신사적이라는 말은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성경이 그러한가 하여 성경을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세를 가져야만 오늘날과 같은 말세에 진리 가운데 바로 설 수 있을 것입니다. 내 개인적인 생각, 깨달음, 고정관념과 다르다 할지라도 성경이 그러하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있는 신사적인 마음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