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복있는 사람
본 문 : 시편 84편 1절 ~ 12절
설교자 : 조 성 훈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복 있는 사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길 원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면서, 어떻게 하면 사람이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갈증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하나님에 대한 이와 같은 갈증을 가진 분이 있습니까? 저는 84편을 묵상하면서 이 사람이야말로 복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또 하나님의 성전에 대해서 이와 같은 사모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시편 84편에서 시편 기자의 바른 소원과 바른 동기, 그리고 바른 이해와 바른 가치관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른 소원과 동기, 바른 이해와 바른 가치관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로 복 받은 사람입니다. 세상에서는 재산이 많거나 혹은, 자녀가 많은 사람들을 보고 복 받았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성경 어느 곳에서도 재산이 많은 사람이 복을 받았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진정한 복이 무엇인지를 이 시편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시편 84편의 배경
먼저 시편 84편의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이스라엘의 남자들은 일년에 세 번 하나님의 성전에서 여호와께 자신들을 나타내야만 했습니다(신명기 16장 16절). 만일 다른 곳에서 재물을 드린다면, 그들은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에서만 제사를 드리게 하셨고, 모든 남자가 일년에 3번씩 자신을 보이도록 하셨습니다. 상상을 해본다면, 좀 멀리 살고 있는 사람은 일 년에 세 번씩 계속해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는데, 그래서 여기서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다’ 라는 말이라든지, 또 다른 성경에 보면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면서 부른 노래가 있는데, 여기 있는 말씀 또한 이스라엘 남자들이 성전에 올라가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들은 일년에 세 번씩 성전에 올라가면서 그 성전을 향한 그리움을 많이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에는 우리가 지역적으로 예배당에서 모이기 때문에 그런 사모함이 없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곳에서만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사모하는 마음을 많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에도 그 성전을 향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었고, 나중에 돌아와서 성전을 재건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전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고, 그들의 삶 자체가 하나님 중심이고, 성전 중심이기 때문에 시편 84편은 바로 그러한 면을 노래한 찬송입니다.
바른 소원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1절)"라는 구절을 통해 시편 기자의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을 볼 수 있습니다. 성막 혹은 성전 그 자체가 하나님은 아니지만, 그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두셨다는 것 때문에 성전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전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2절)” 우리는 흔히 남녀가 너무 사랑해서 병이 되면 몸이 점점 쇠약해진다고 말합니다. 얼마나 서로를 사모했으면, 몸이 쇠약해가겠습니까?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그 마음이 쇠약해진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바른 소원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갈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 때문에 얻어지는 어떤 것들을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살아계시는 하나님께 자기의 사모하는 마음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정을 사모하는 마음은 바로 하나님을 사모하는 것입니다. 이 예배당 자체가 성전은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용되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에 예배당에 대한 많은 애착을 갖고 있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예배당 자체를 사모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당의 주인이신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그렇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듯 시편 기자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었고, 후에 그가 말하듯, 하나님을 찬양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있는 사람은 정말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한 주일만 빠져도 마음 속에 주님의 만찬, 주님을 예배하는 것들이 그리워서 못견뎌하는 성도들이 있지만, 몇 달을 빠져도 아무렇지도 않은 성도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그리워하고, 예배를 그리워할 때는, 빵이나 잔을 그리워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주의 만찬을 그리워하고, 예배를 그리워하는 것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또한 그것이 정상적인 것입니다. 1년을 빠지고, 2년을 빠져도, 그것에 대한 마음이 없는 것은 주님에 대한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것입니다. 주일이 지나고 나면, 언제 수요일이 올까 하면서 기다리는 성도가 있는 반면, 주일이 지나면, 또 ‘금방 수요일이 왔구나’ 하는 성도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성도들을 다르게 만드는 것입니까? 그 마음 속에 주님에 대한 마음이 나타납니다. 성도들에 대한 마음은 주님에 대한 마음이며, 그 사모하는 마음은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주일이 빨리 오는 사람은 마음 속에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많이 결여되어있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늘 주님 앞에서 나와서 예배하는 주일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며, 다음 주일을 기다리는 사람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과 모임을 그리워하고, 교제를 그리워하며, 또 다시 주님 앞에 모이는 것을 사모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는 것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 마음 속에서 사라지는 것이 바로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형식은 남고, 마음은 사라집니다. 주님께서 에베소 교회에 편지를 보내시면서 “너희가 첫사랑을 버렸다. 너희가 봉사도 잘 하고, 여러 가지 일을 잘 하지만, 내가 너희에게 한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희가 처음 사랑을 버렸노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 관계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마음이 있는 사람과 마음이 없는 사람은 다릅니다. 똑같이 주일날 교회에 나와 있어도 주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을 보시기 때문에 우리 마음 속으로부터 주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바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3절)” 참새가 집을 안 짓는 곳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성전에도 아마 참새와 제비가 집을 지은 것 같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 참새와 제비를 보고, 그것들이 자신보다 복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일년에 세 번 밖에 성전에 나오지 못하는 자신보다 항상 하나님의 전에 사는 새들을 부러워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의 소원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봅시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부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들이 가득 차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가득 차있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외의 그 어떠한 것에 대한 갈망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습니다. 시편 27편 4절에서 볼 수 있는 시편 기자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내가 여호와께 청하였던 한 가지 일 곧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나로 내 생전에 여호와의 집에 거하여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사모하게 하실 것이라.”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섬기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면서, 하나님을 찬송하며, 하나님을 섬기기를 원하는 시편 기자의 소원은 얼마나 귀합니까? 자신의 남은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은 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세상적인 탐욕으로 가득 차있는 그리스도인처럼 추하게 보이는 것은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그 마음 속에 주님께 영광 돌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는 사람, 입만 벌리면, 그러한 갈증이 나타나는 사람은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한 형제는 입만 벌리면 남은 삶을 주님을 위해 일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저는 그 형제가 참으로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어떤 일이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길 원한다” 라고 말합니다. 또 시편 기자는 42편에서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노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라고 말하는데, 이는 시편 기자 역시 하나님 존 전에 나아가서 하나님을 만나서 경배하기를 원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소원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라도 이와 같은 올바른 소원을 가지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바른 동기
두 번째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동기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찾는 그 목적이 올바르다는 것입니다. 안믿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지만,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중에도 하나님을 찾는 동기가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참 많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나를 찾아온 까닭은 나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에 온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그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는 그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어떤 청년을 유산을 나누기 위해 주님을 찾았고, 또 어떤 이들은 병을 낫기 위해, 먹고 배부르기 위해, 표적을 보기 위해 주님을 찾았습니다.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온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4절)” 이 말씀에는 시편 기자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하는 이유가 나와있습니다. 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궁전을 사모하고,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집에 거하는 자가 하나님을 항상 찬송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부러워한 것입니다. 그 동기가 올바른 것입니다. 앞서 27편 4절에서도 그 이유가 나와있는데, 이 역시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앙망하며 그 전에서 하나님을 사모할 수 있는 것 때문입니다. 시편 기자가 그렇게 예루살렘 성을 향하여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하나님의 성전에 거하는 것을 부러워한 이유는 바로 성전에서 영원히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동기가 올바른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구하는 우리의 마음이 어떠한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공부하면서 제 자신을 많이 돌아보았습니다. 첫째로는, 내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이런 강한 갈증,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가 하는 것이고, 둘째로, 주님을 섬기는 내 마음 속에 주님을 찬양하는 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바른 이해
세 번째로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바른 이해입니다.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라.” 이 말씀을 요약하자면, “하나님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분이요, 우리의 보호자요, 은혜를 베푸는 자요, 그를 섬기는 모든 섬김에 대해 우리에게 보상하시는 분이시오, 영화를 주시는 분이시오, 자신의 모든 것을 주장하시는 분이시오, 모든 우주의 주이시라” 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사람들의 이유는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알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의 신앙의 깊이는 하나님을 얼마나 알고 있으며,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있느냐에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있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못 믿고, 하나님을 잘못 섬기는 일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섬길 수 밖에 없으며, 올바로 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을 잘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지만,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시며, 우리의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모든 것을 실제로 통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명, 우리의 행복, 우리의 안녕, 우리의 가정, 우리의 사후, 우리의 운명 등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열심히 유기농 농산물만 먹으면 오래 살 것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등한시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오래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도움은 되겠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건강, 수명, 등의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 달려있습니다. 단 한 순간도 하나님의 도움 없이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시편 기자는 그가 모든 것을 주장하시고, 하는 것에 따라 갚아주시고, 은혜를 베푸시며,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그러한 모든 것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이해가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바른 가치관
네 번째로,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4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10절)” 시편 기자의 가치관을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이 예배당이 성전이라고 해봅시다. 다른 곳에서 천 날을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예배당에서 하루를 사시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일주일 중에 주일날이 가장 피곤하다고 말합니다. 정상적이라면, 일주일 중에 주일이 가장 신나고, 좋고, 행복하고, 즐거운 날이 되어야하지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주의 궁전에서의 하루가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더 낫다고 말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곳에서의 일주일과 교회에서의 하루 중에 어떤 것이 더 낫습니까? 혹시 주일 예배 끝나고 집에 갈 때 해방감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시편 기자는 다른 곳에서 어떻게 보냈을지 모르나, 그 천 날을 보내는 것보다 하나님의 집에서 하루를 보내는 것이 훨씬 더 낫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가치관이 제대로 되어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가 주일날 와서 봉사하고, 공부하는 등의 일들만을 생각하면 피곤하게 느껴지지만, 주님과 함께 대화하고, 교제하며, 예배하고 찬송하는 자리에 주님이 함께 계신다면, 피곤하게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 또 주일이 올지를 기다릴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주일마다 천사들을 몇 명씩 유평 예배당에 함께 데리고 오셔서 참석하셔서 만찬도 하고, 공부도 한다면, 아무도 지각하지 않을 것이고, 또 피곤해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만이 신앙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신앙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고 하는 것 위에 서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상적인 신앙입니다. 신앙은 이론이 아닌 실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십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하나님의 전에서의 하루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하나님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문지기가 얼마나 피곤하며, 지치게 되는 일인지 아십니까? 그런데, 시편 기자는 그러한 일이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더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의 가치관이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가치관이 되어있지 않으면, 신앙 생활을 올바르게 할 수 없습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 하기가 어려운 줄 아십니까?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영적인 삶을 살려고 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영적인 삶을 사는 것은 하나도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주의 궁정에서의 하루를 더 낫게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을 피곤해하겠습니까? 이러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교회 오는 것이 즐거우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즐거운 사람입니다. 그 가치관이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모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 성전이 저만치에서 보이면, 힘이 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영적 가치관이 제대로 되어있는 사람의 행동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은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결론
여러분, 시편 84편의 기자를 볼 때,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복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 올바른 소원과, 동기, 이해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이 정말 복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올바른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올바른 동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올바른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까? 주님에 대해서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있습니까? 진짜 복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바로 이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습니까? 이러한 것에 눈을 뜨시기 바랍니다. 영적인 가치관, 올바른 동기,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 올바른 소원... 이런 것을 소유한 사람이 진실로 복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모두 남은 삶을 추하게 살지 마시고, 복 있는 사람으로서 남은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