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심

2007년 October 14일 ()

본문: 요한복음 1:43-51 |

주 제 : 빌립과 나다나엘을 부르심

 

본 문 : 요 1:43-51

 

설교자 : 조 성 훈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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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여러분이 시내에 나갔는데 어떤 사람이 서서 “나를 따르시오”라고 한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 아마 쉽게 그를 따라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빌립을 부르심

 

빌립은 벳새다 사람입니다. 베드로, 안드레도 역시 그 지역 사람이고 예수님의 제자들 대부분이 갈릴리 지역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따르라고 했을 때 빌립은 그 부름에 따랐는데 빌립이 어떻게 예수님을 알고 따라갔을까 의문입니다. 아마도 그는 요한에 의해서 예수님에 대한 것을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또한 예수님에 대한 소문도 이미 들었을 것이고, 무엇보다 그는 성경에 많은 지식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45절에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들이 기록한 그를 우리가 만났다”고 증거하는 부분을 보게 되는데 그는 성경에 근거해서 예수님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본문 말씀은 예수님이 하나님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함께 동역할 일꾼, 제자를 부르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것은 매우 큰 특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세계적인 규모의 회사에서 한국지사를 세우고 임원진을 뽑는다고 할 때, 그 자리를 갖게 된 사람은 정말 기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할 일꾼을 뽑는 영광스러운 순간에 하나님은 자신을 소개하거나 어떤 증거를 보여주시지 않았습니다. 그저 “나를 따라오라”고 했을 뿐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일 성경을 읽고 몇 십 년을 교회에서 주님을 배우고 알고 있는 사람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라간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부르심에 즉각 따랐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따라가고 그물을 깁고 있다가 배를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님께 “먼저 가서 부모를 장사하게 하소서” 했지만 주님은 거절하셨습니다. 사람의 생각에, 하던 일을 마저 하고 가거나 다 정리한 뒤 가고 싶지만 주님은 그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빌립은 결단력 있는 사람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따랐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알고 있었던 것은 그가 구약에 기록된 메시야라는 사실입니다. 빌립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몰랐을 뿐 아니라 그의 부르심에 응함을 통해 얻게 될 것들이 얼마나 큰 영광인가 하는 것을 몰랐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자신이 선택한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어려운 길인지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마 10:37-38)”,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터이라(요 15:20)”고 제자로서의 삶이 얼마나 고통스러울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빌립을 부르실 때 빌립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하나는 제자로서의 험난한 삶이고 또 하나는 제자로서의 영광스러운 삶입니다. 모세를 비롯한 모든 하나님의 종이 그러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의 일꾼을 세우기 위해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나님을 위해 일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 길이 험난하고 힘들기 때문에, 결정적으로 많은 돈을 주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다나엘을 부르심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전도하는 모습을 보면 그에게 말하기를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다, 나사렛 예수이다”고 했습니다. 나사렛이라는 동네는 사람들의 관심을 잘 끌지 못하는 곳입니다. ‘개천에서 용이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별 볼일 없는 곳에서 대단한 사람이 나오면 사람들은 신기해합니다. 나사렛은 대게 배우지 못한 사람이 모여 살고 세상적으로 유능한 사람이 많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제자들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그들은 출신지도 좋지 않고 직업도 천한 어부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어부들을 ‘뱃놈’이라고 부를 정도로 천시했습니다. 예수님은 당시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나사렛에서 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그 길을 택하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흠모할 만한 곳이 아닌 곳을 택하셨습니다. 아마 오늘날의 처녀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한다면 예수님과 결혼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주님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나사렛이라는 동네에 사셨습니다.

 

나다나엘이 의심하며 “어떻게 나사렛에서 메시야가 나올 수 있느냐”고 했습니다. 이에 빌립은 지혜롭게 대처했습니다. 의심하는 이 사람에게 빌립은 “와 보라”고 단순히 말했던 것입니다. 나다나엘을 만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다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주님은 늘 만난 사람에 대해서 그의 핵심적인 부분을 말씀하십니다. 우물가의 여인에게도 그러했습니다. 나다나엘이 “나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니 주님은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 보았다” 하셨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해석이 분분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도 없을 때 나다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는데 멀리서도 주님은 그것을 아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말에 나다나엘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그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임금이라는 것을 고백합니다. 나다나엘은 정말 마음에 간사한 것이 없습니다. 간사한 것이 없다는 것은 그가 완벽한 사람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것은 정직한 사람을 가리키고 정직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의 마음을 보시고 말씀하셨을 때, 나다나엘은 주님이 은밀한 것을 보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를 믿었습니다. 또한 그도 역시 구약 성경에 예언된 메시야를 알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8장 15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의 중 네 형제 중에서 나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너를 위하여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를 들을 지니라”, 창세기 49장 10절에 “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민수기 24장 17절에 “내가 그를 보아도 이 때의 일이 아니며 내가 그를 바라보아도 가까운 일이 아니로다 한 별이 야곱에게서 나오며 한 홀이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나서 모압을 이 편에서 저 편까지 쳐서 파하고 또 소동하는 자식들을 다 멸하리로다”, 이사야 9장 6,7절에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등의 말씀이 구약 성경을 통해 예언되어 있습니다(렘 23:5, 6 단2:44 미 5:2 슥9:9).

 

이스라엘 백성은 이와 같이 메시야가 오실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의 문제는 주님이 육체를 입고 오시는 것과 영광 중에 오시는 것, 이 두 가지 이미지가 겹쳐 진정한 모습을 보지 못한 것입니다. 성경에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이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구분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그들을 혼동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베들레헴에 태어날 것과 은 삼십에 팔릴 것,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은 모두 초림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구약 성경에는 한 왕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나라를 영광 중에 인도하고 적들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눈물을 제하며 영광스러운 나라를 세울 것들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혼란스러운 것입니다.

 

사람들은 마음 속에 그리는 메시야에 대한 상(像)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과 맞지 않으면 받아들이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다나엘 역시 혼란스러웠겠지만 주님이 자신의 모습을 나타내셨을 때 그분을 메시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무화과 나무 아래서 보았다고 믿느냐 더 큰 일을 보리라” 하셨습니다. 또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사자들이 역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가 앞으로 어떤 분을 섬기며 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며 겪게 되는 어려움과 장차 우리가 받게 될 영광을 함께 생각하기 때문에 때때로 갈등이 됩니다. “땅에 것을 생각지 말고 위엣 것을 생각하라”고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위엣 것’ 즉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만을 생각한다면 주님을 따라가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빌립은 예수님의 가치를 발견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꿈, 비전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갈 가치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까. 예수님께서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지금 당장 나를 따르라고 한다면 따를 수 있겠습니까. 자신의 모든 꿈과 계획, 성공과 취미 등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제 예수님의 꿈이 내 꿈이 되고 예수님의 일이 내 일이 되며, 예수님의 기쁨과 슬픔이 내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빌립이 예수님을 따라간 이유는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가치를 예수님에게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빌립과 나다나엘의 결정을 잘못된 결정이라고 말할 이 없습니다.

 

주님을 따르기 원하지만 주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에게 “율법을 다 지켜라”, “너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줘라”(마 19:21-22)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마치 돈을 수천억 가진 사람이 십 원을 가지고 있는 아이에게 그 십 원 버리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청년이 얼마나 부자였는지는 모르지만 주님께서 그것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 나눠주고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심히 근심하고 갔습니다. 그가 만일 주님이 명하신 대로 행하고 주님을 따랐다면 그는 얼마나 큰 축복을 받았겠습니까. 그 청년을 생각할 때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이 나에게 명하신다면 나는 자전거 하나라도 팔로 주님을 따를 수 있을까.

 

주님을 따르는 데는 대가가 따릅니다. 그러나 그로부터 얻는 것 또한 많습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축복이 있습니다. 땅에서 보화를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소유를 팔아 땅을 산 사람처럼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엄청난 보화를 발견한 것과 같습니다. 나의 모든 것을 팔아서 드릴지라도 주님은 섬길만한 가치가 있는 분입니다. 천원을 투자해서 억을 번다면 투자를 아까워할 사람이 없습니다. 예수님께 투자해서 손해 본 사람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 수고가 결코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고 말합니다.

 

주님은 이 시간에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는 얼마나 이 부름에 응할 수 있을까요. 주님의 부르심에 응하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나 하늘에서나 그에게 큰 축복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주님에게서 그만한 가치를 발견하고 따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