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
본 문: 갈라디아서 5장 16-26절
설교자: 조 성 훈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사람이 구원을 받고 나면 그의 마음 속에서 갈등이 시작됩니다. 성령이 원하시는 욕구가 있고 육체가 원하는 욕구가 있어서 그것이 서로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본문은 육신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이러한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입니다. 참 아이러니한 것은 영적으로 성숙하고 예민하며 깨어있는 사람일수록 그 갈등이 심하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영적으로 무디고 잠자고 있는 사람일수록 갈등이 적습니다. 자신의 신앙생활에 문제가 전혀 없고 늘 태평하다면 그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의 소욕은 육신의 소욕과 대치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소욕이 거하는 자의 삶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19-21)”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 여러분과 저에게는 육체의 욕구가 가득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짓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원수가 잘됐다는 소식보다는 잘못되었다는 소식이 반갑지 않습니까. 원수가 망했다면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육체의 욕구가 그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성령의 욕구가 나타나게 되는데 문제는 기존의 육체의 욕구와 새로운 성령의 욕구가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싸우는 것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소욕을 3가지로 말하고 있는데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요일 2:16). 사람도 자신이 육신의 정욕에 따라 살고 싶어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은 스스로 육신의 정욕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 죄의 종, 육체의 종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정욕에 메어있는 노예들입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딛 3:3)” 종은 스스로 그 굴레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런 해결책이 없습니다. 그것이 구원받기 전의 모습입니다. 이 강한 능력의 사단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물론 육체의 욕구에도 즐거움은 있게 마련입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이 말씀에서 모세의 삶에 대해 표현한 것을 보면 “잠시 죄악의 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술을 마실 때 인상을 찌푸리고 마시는 사람은 없습니다. 나름대로의 낙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좋은 열매를 가져오지는 못합니다. 잠시 동안의 낙일 뿐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
육체가 이루는 열매는 참 추합니다.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은 육체의 욕구를 이루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것을 조장한 상술이 발전하고 있습니다.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인간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들입니다. 육체의 열매들은 우리가 추구하고 싶은 열매들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들은 우리에게 진정한 만족을 가져다주지도 못합니다. 내 주머니에 천 만 원만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하지만, 가진 사람은 그것 가지고 만족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갈증은 끝이 없는 것입니다. 죽을 때까지 돈을 더 모으고 더 채우려고 애쓰다가 죽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믿기 전보다 믿은 후에 갈등이 더 많습니다. 우리 안에 성령께서 계시기 때문에 더욱 갈등하는 것이고, 성도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성경을 읽고자 하는 갈증이 있기 때문에 더욱 힘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을 믿으면 그 순간부터 전쟁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이 싸움이 점점 사라집니다. 성령님의 소리를 무시하고 짓밟다보면 성령의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입니다. 죄책감을 잘 느끼지 못하고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르는 것입니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있는 자의 삶
“나의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원하는 이것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그것을 함이라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 7:15-25)” 아침에 경건의 시간을 갖고 성도에 대한 사랑을 꼭 실천하겠다고 결심한 뒤 그날 우연히 길에서 미워하는 사람을 만났다면 어떨까요. 그날도 실패한 뒤 집에 와서 후회하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습니까.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은 이런 고통입니다. 원하는 것은 행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내가 미워하는 그 일을 결국 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육체의 소욕 때문입니다. 내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싸우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지 않았다면 육체의 소욕만이 거하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안 믿는 사람들도 양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무뎌가기 마련이고 나중에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사람은 우리 안에 성령이 계시고 양심이 살아납니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는 말씀이 있듯이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양심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가 많습니다.
성령의 소욕과 육신의 소욕의 싸움은 우리가 이 육체로부터 구원을 받게 될 때, 모든 갈등에서 해방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는 진정한 사랑으로 성도를 사랑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는 말씀처럼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음성을 생생히 듣거나 분명히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의 음성은 그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22-23)” 성령의 소욕에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문득 말씀이 떠오를 때나 설교를 통해서, 다른 성도를 통해서 깨닫게 될 때, 또는 양심을 통해서 느낄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성령의 소리에 따라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는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랑을 마음속의 뜨거운 감정을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성령에 따라 사는 것은 불의한 일을 당하고도 오래 참는 것, 주일학교나 청년회 등 부서활동에 충성하는 것, 온유하고 자비하며 화평하고 절제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본성은 이렇지 않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잘 먹고 잘 살고 싶게 마련인데 성령의 소욕을 듣고 따르는 사람은 그것을 인내하는 것입니다. 절제하고 근검절약하여 검소하게 사는 것, 나보다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주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사는 것, 성도들이 어려움을 준다 해도 온유하고 오래 참는 것이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사는 사람의 열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24-26)” 우리가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기 위해 부름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이 우리를 위해 돌아가신 이유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에 대하여 죽임을 당했습니다. 우리의 꿈은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꿈과 주님의 원하심만 남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이제 새로운 한해를 맞고 있습니다. 세상의 각처에서는 기근과 지진과 전쟁과 폭탄테러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오심이 점점 가까이 왔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열매를 점검할 때입니다. 이제는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소욕에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가까이에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늘 여러분 안에 거하도록 해야 합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자매들과 영적인 교제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맡겨진 일에 충성하시고 모임에 잘 참석하시며 성령의 먹이를 많이 주십시오. 성령의 소욕을 북돋을 수 있는 일을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강한 성령의 소욕이 육체의 소욕을 이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평소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의 싸움에서 어떤 것이 많이 이깁니까. 육체의 소욕이 많이 이기지 않습니까.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육체의 소욕에는 많이 먹이고 성령의 소욕에는 많이 먹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제 성령의 소욕을 강하게 하시고 육체의 소욕은 되도록 굶겨서 약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한 해가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