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사랑한 제자

2009년 October 18일 ()

본문: 디모데후서 4:9-16 |

주 제 : 세상을 사랑한 제자

 

본 문 : 딤후 4:9-16

 

설교자 : 조 성 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구리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저는 오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주님에게서 멀어져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보았고 또 그들 중에 더러는 세상에서 살아가다가 주님에게로 돌아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왜 세상으로 갔으며 다시 돌아오는 자들은 왜 다시 돌아오는 것일까요? 또한 돌아오지 않는 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은 것일까요?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세상으로 간 제자

 

10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으로 간 데마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선교지에서 일했던 사람입니다.(골 4:14) 그는 아시아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지만, 바울이 두 번째로 감옥에 갇혔을 때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 곁을 떠나 고난을 피해 데살로니가로 갔습니다.

 

오늘날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과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세속화되어 있습니다. 또 한 발은 교회에 두고 한 발은 세상에 두면서 양 쪽 모두에서 즐거움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 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지구를 말하지만 이 세상의 모든 조직과 활동, 삶 등을 말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사탄의 통제 하에 있는, 하나님을 반하는 모든 것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육신이 하나님을 떠나 하는 모든 것들을 '세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지만 하나님께서 이 땅을 사탄에게 맡기셨기 때문에 이 세상의 주인 또는 임금은 사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눅 4:5-6에서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절하면 예수님께서 사탄에게 넘겨주신 천하만국을 다시 주겠노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사탄이 이 세상의 주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세상의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과 사탄은 정반대되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 때 하나님의 뜻과는 반하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유혹은 어떠한 것들이 있을까요? 성경은 다음의 세 가지 유혹이 있다고 말합니다. 첫 번째는 육신의 정욕입니다. 육신의 정욕에는 식욕과 성욕 등이 있습니다. 이는 본능과 관련된 것으로 상당히 강한 것들입니다. 두 번째는 안목의 정욕입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유혹을 당할 수 있습니다. 소유욕, 물질욕 등이 대표적인 것입니다. 새로운 것, 좋은 것을 보면 우리는 그것을 소유하고 싶어집니다. 만일 우리가 시각 장애인이라면 그러한 유혹은 받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차를 가지고 싶고 좋은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다 이러한 안목의 정욕입니다. 세 번째는 이생의 자랑입니다. 높은 지위나 권력을 갖는 일, 뛰어난 지식을 갖는 일, 자식의 출세, 이러한 것들 또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강하게 유혹받는 것들 중 하나입니다. 성경은 이러한 모든 것들이 멸망할 것이며 사라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주님이 전부인 것처럼 믿고 살던 많은 사람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 둘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왜 세상으로 가는 것일까요? 첫째, 세상에 있는 것들이 좋아서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 자신의 삶 속에 있고 그러한 것들이 그를 즐겁게 하고 그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세상으로 가는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에 실망해서 세상으로 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너무 세속화 되어서, 교회가 자기 맘에 들지 않아서,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거나 할 수 없기 때문에 만족하지 못하고 교회를 떠나는 것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실망해서 세상으로 가기도 합니다. 교회의 일꾼들에게 실망해서 교회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지 못해서 이 교회, 저 교회를 떠돌아다니다가 세상으로 갑니다. 이들의 공통점은 저마다의 이유로 인해 주님을 떠나지만 그들의 삶에 대한 갈증은 주님을 떠나서는 그 어디서도 채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갔다가 돌아온 제자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떠나 세상으로 갔지만, 그들 가운데는 다시 주님께로 돌아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마가는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 여행을 하다가 중간에 돌아갔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절대로 마가를 전도 여행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말합니다.(11절) 마가 뿐 아니라 여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으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모습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나오미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녀는 흉년이 들어 예루살렘을 떠나 이방 지역으로 갔다가 다시금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가고 있고 또 그 중에 세상에서 나와 돌아온 자들도 있습니다. 그들이 주님께 다시 돌아온 이유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진정한 만족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평안과 기쁨, 만족은 오직 주님 안에 있다는 것을 다시 확인했기 때문에 다시 돌아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 중에는 그리 오래 세상에 있지 않고 바로 돌아온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그 많은 물질을 세상에서 다 탕진하고 나오미처럼 빈 몸으로 돌아온 자들도 있고, 또 젊음과 건강을 세상에서 다 소진하고 늙고 쓸모없는 몸으로 돌아와 그 때부터 무엇인가 주를 위해서 일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후회를 해도 이미 늦은 때입니다.

 

그리스인들이 세상에서 신자로서 살기 힘든 이유

 

14절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구리 장색 알렉산더에게 많은 해를 입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는 적이 많았습니다.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불신자들이 그의 적이었고 그 뿐 아니라 거짓 형제와 거짓 사도들이 그의 적이었습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갈 때 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에게도 많은 적이 있습니다.

 

첫째로, 우리는 불신자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합니다. 먼저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들과의 대화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것을 이야기하고 그들은 땅의 것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잘 맞지 않고 그러다보니 사이가 멀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 자신이 하늘의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믿지 않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늘 이야기, 하늘에 속한 이야기, 하늘의 소망, 부활의 소망, 우리의 기업에 대한 소망, 영적인 가치관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대화가 통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고, 세상은 우리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세상은 우리를 버리고 우리는 세상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직장이나 사회에서 불신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가만히 놔두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을 멸시하고 핍박하기도 합니다.

 

둘째로, 거짓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어려움을 당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 잘못된 간증을 보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것에 넘어지고 어려움을 겪습니다. 주님을 위해 열심히 살려고 하는 성도에게 그렇게까지 열심히 할 필요 없다며 방해하고 어려움을 줍니다. 그들뿐만 아니라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로 부터도 미움과 방해를 받습니다. 육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은 헌신적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핍박하고 방해하며 질투합니다. 또 육신적으로 살면서도 잘 될 수 있음을 말하며 넘어지게 만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면서 어려움을 겪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이야기했고 또한 주님께서도 요 15:18-19에서 우리가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주님의 택함을 입은 자이기 때문에 세상이 우리를 미워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의 수많은 일꾼들도 많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사도 바울과, 또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가장 큰 적은 거짓 선지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구약의 모든 신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행 7:52) 다른 사람이 핍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선지자들과 하나님의 일꾼들을 핍박했습니다. 더러는 죽이고 더러는 내쫓고 더러는 채찍질했다고 말합니다. 구약에 나오는 진정한 하나님의 선지자들은 모두 이처럼 핍박을 받았습니다. 신약 시대에도, 오늘날에도 이는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신실하게 살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습니다. 그래서 외롭고 힘들어서 세상으로 떠나가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홀로 가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실한 자들의 축복

 

처음 우리가 주님을 믿으면 얻는 것도 많고 기대되는 것도 많습니다. 성도들에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 기대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삶을 살아가다 보면 실망도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먼저 된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기대와는 달리 세속적으로 살아가는 것들을 발견하고는 실망하기도 합니다. 또한 구원 받은 자신이 이제는 전과는 다른 새로운 삶을 살 것 같았는데 그렇지 못해서 실망하고, 자신 안에 구원받기 전에 있었던 것들이 여전히 있는 것을 보면서 실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결국 깨닫게 되는 것은 신앙의 길이 주님과 단둘이 걸어야 하는 고독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는 차츰 주님 안에서의 만족을 찾게 됩니다. 주님만으로 만족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신앙 생활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생활을 할 때, 때때로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을 통해서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주님 안에서 자신이 맡은 일들을 묵묵히 성실하게 실행하는 신실한 자들은 우리들에게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 한 사람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이 됩니다. 또한 어떠한 그리스도인들은 많은 일을 하지는 않지만, 모임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참석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주기도 합니다. 모임에 참석하는 것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부분입니다. 세상에 빠진 그리스도인들의 특징 중 하나는 모임을 등한시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모임에 성실하게 참여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주님 안에 있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큰 힘이 되는 것은 하늘의 소망입니다. 무엇보다 하늘의 소망,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이 우리에게 큰 힘이 되며 하늘나라에서의 삶과 보상에 대한 약속 또한 우리에게 큰 위로와 힘이 됩니다.

 

결론

 

지금 이 순간에도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과 교회를 떠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세상으로 갔다가 많은 것들을 허비하고 돌아오는 사람들도 있는가 하면, 아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평안하고 안정된 삶이 아니라 세상과 반대되고 핍박이 있는 삶이기에 어렵지만 주님 안에서 신실하게 자기가 맡은 일들에 충성하는 것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지키는 것이며 나아가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신앙을 지켜주고 다른 성도들에게 힘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더 나아가 여러분에게 교회 안에서 맡고 있는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하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신앙을 지켜주고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모이기에 힘쓰고 맡은 일에 충성함으로 세상을 사랑하는 제자가 아니라 주님을 사랑하는 제자가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