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시련 가운데서의 기쁨
본 문: 베드로전서 1장 6-11절
설교자: 조 성 훈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시편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인생은 그 자체가 고통이요, 시련입니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가면 이 모든 것을 잊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시련은 그것을 올바른 자세로 대하기만 한다면 우리에게 무의미하게 지나가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에 큰 성장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
시련 가운데서 기뻐하는 그들
사도 베드로는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있는 신자들에게 환란 가운데서 하나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1:6)”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의 말씀과 연관이 있는데, 앞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하늘나라의 기업을 잇게 하시며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사실이 환란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큰” 기쁨과 위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들과 비교한다면 시련 가운데 있다고 볼 수도 없습니다. 우리 중에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어놓아야 하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믿으면 감옥에 가고 죽기도 하는 등 육체적인 시련이 컸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이나 회교국가 등에는 그런 곳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극한 시련 가운데서 기뻐하고 즐거워했습니다. 오히려 오늘날 우리의 기쁨보다 더 컸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정신적인 시련은 많이 있습니다. 믿음을 지키기 위해 주위 사람들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받을 수 있고, 부패된 사회에서 의롭게 살고자 할 때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회사에서 만든 제품을 팔기 위해 다른 제품에 하자를 만들기도 하고, 어떤 부패한 의사는 있지도 않은 용정을 만들어서 넣었다가 꺼내는 수술을 한다고 합니다. 참 믿을 수 없는 세상입니다. 이러한 죄악에 물든 세상에서 정직하게 산다면 부자가 될 수 없고, 믿음을 지키고 산다면 어려움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점점 더 좋아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더 교묘하게 타락하고 더 고단수로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당시 성도들은 하늘나라의 소망을 생각하며 극심한 육체적인 시련을 이겨냈습니다. 놀랍게도 어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간증할 것이 많고 감사가 넘치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시련이 없고 부한 사람은 감사의 제목이 적습니다. 믿음으로 인하여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그들의 마음이 영적으로 풍성한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의 삶에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시련이나 고통을 말할 때 늘 “잠깐”이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이 땅에서 받는 고난을 일시적인 것으로 말하고 있고, 그 보상에 대해서는 영원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
이런 어려움들이 그리스도인에게 왜 오는 것일까요? 어려움 가운데서 하늘나라를 생각하게 하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우리 삶의 잘못된 것들을 털어내고 주님을 닮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또한 믿음의 순수함을 지키게 하기 위함입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신실하게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이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믿음에는 큰 대가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온 “칭찬과 영광과 존귀”가 그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기뻐하는 그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1:8-9)”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30년 뒤에 쓰인 것이니 이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그러했다면 동일하게 주님을 보지 못한 우리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요? 오늘날 우리도 그들과 같이 현실적인 기쁨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것을 구하기보다 우리 안에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들은 마음의 눈을 떠서 하늘나라의 복된 소망을 보고 자신의 영혼의 구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영혼의 구원이라는 한 가지 사실이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우리를 위하여 준비한 모든 기업과 구원의 즐거움으로 평생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보는 눈의 방향이 중요합니다. 저는 미얀마에 가서 한 네팔 가족을 보았는데 그들은 들판에 비닐로 집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들을 보면 “내가 사는 집이 천국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현실은 극심한 환란 가운데 있더라도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기대하는 모든 것을 다 채워도 그 욕구는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것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속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자신도 모르게 찬양을 흥얼거리게 될 것이고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간증을 하기 위해 줄을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받은 이후에 그저 세상에서 힘들게 살아가다가 하늘나라에 가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은 구원받은 이후부터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앞서 간 믿음의 선진들은 그러한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것들을 누리고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결론
베드로는 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지금 잠시 환란 가운데 있지만 크게 기뻐하는 이유는 하늘나라의 소망을 바라보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이 어려움은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져오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마음의 눈을 하늘로 향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하늘의 소망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죄악으로 물든 세상에서 구원받아 이르게 될 하늘나라를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의 생각을 하늘나라로 끌어올려 여러분을 위해 준비된 축복과 영광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