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신앙과 섬김
본문 : 누가복음 22장 27절
설교자 : 조성훈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오늘 설교 본문은 짧지만 그 무게에 있어서는 굉장히 무거운 내용입니다.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한 부류는 종교인으로 생활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부류의 사람들은 정말 그리스도인으로서 생활하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았습니다. 한 마디로 요약해서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섬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서서 섬기는 자가 더 크냐’고 물어보셨습니다. 주님은 ‘앉아서 먹는 자가 더 크지 않느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안에 있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자입니다. 우리는 그 분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께서 말하는 ‘너희’는 1차적으로는 열두제자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열두제자 중에 누가 제일 낮은 자입니까? 누구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누구도 가장 낮은 자를 예수님으로 생각하진 않을 것입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노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앉아서 대접을 받는 사람이 더 지위가 높다고 생각하지 시중드는 사람을 더 높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제자들 가운데 수건을 두르시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집에 들어가서 발을 씻는 관습이 있었는데 발을 씻기는 것은 종의 역할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일을 함께 할 때 상대방의 신분이나 위치 등을 속으로 계산합니다. 계산 후에 자신의 위치에 따라 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섬겨줄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주님은 ‘너희가 나를 주라 또는 선생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여러 말씀들을 종합해볼 때, 주님은 창조주로서 계셨던 것이 아니라 섬기는 자로 계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놀라운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서로 섬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교회 뒤뜰에 잔디를 조성하고 있는데 주말에 어떤 형제님이 오셔서 걸레로 뒤뜰의 의자들을 다 닦고 계셨습니다. 그것이 섬김의 자세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더라도 성도님들이 앉아서 쉴 수 있도록 주변을 정리하는 그 모습이 바로 섬김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남이 알아주지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성도님들을 섬기시는 분들이 많습니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십시오. 성도들을 섬기는 것을 빼놓고 무엇이 신앙생활입니까? 성경공부를 열심히 해서 성경지식이 해박하다고 한들, 모든 집회와 교회활동에 참석한다고 한들 그것만이 신앙생활의 전부라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교회와 성도는 섬김의 터전입니다. 주님은 항상 섬기는 자세로 사셨고 사도바울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에 성공한 사람은 자신을 항상 다른 사람을 섬기는 위치에 두는 자입니다.
섬김이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마음속에서 섬김이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분이 계십니까? 그것은 우리 본성과 맞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처음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 인간 안에 좋은 것들만 채워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좋은 속성들이 인간 안에 있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되었을 때에는 사랑, 은혜, 자비, 거룩, 공의, 진리, 인내, 지혜, 선, 관대함과 같은 하나님의 상대적인 속성들이 사람 안에 들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속성 전능, 전지, 편재는 사람 안에 넣어주지 않으셨지만 우리들에게 하나님 속에 있는 사랑의 본질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이 개입해서 인간이 범죄하게 된 후에는 악의, 시기, 살인, 분쟁, 사기, 비방 이런 것들이 사람 안에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간에게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이기심입니다. 사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쓴 편지에서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딤후 3:1-2)”라고 했습니다. 봉사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이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 자기 자신을 먼저 생각하고 섬기는 자로서 봉사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낍니다. 여러분은 섬김을 받고 싶습니까? 섬기고 싶습니까?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은 섬김을 받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녀를 교육시킬 때 열심히 공부해서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가르칩니까?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 좋은 직장에 가서 편하게 일하라고 가르칩니다. 요즘은 성공을 ‘일을 적게 하고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것이 성공이라고 가르칩니다. 또 여러분의 자녀가 맞고 오면 너도 때리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최근 가슴 아픈 뉴스를 봤습니다. 어느 유치원 옆에 장애아 시설이 있는데 그 시설의 장애아가 유치원에 가서 문을 열어서 한 유치원생이 놀랐습니다. 그 놀란 유치원생의 부모가 장애아를 고소해서 배상금을 받았습니다. 세상은 이렇습니다. 조금도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하고 자신의 자녀가 섬김을 받는 자리에 가기를 원합니다. 모든 사람의 노력이 섬김을 받으려는데 있습니다. 주님은 그렇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노라’고 하셨습니다. 신앙의 위대함이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봉사하는 분들이 부러운 이유는 자기의 이기심을 죽이고 봉사를 할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신앙생활이 한 마디로 말해 무엇입니까? 성경공부, 교회출석입니까?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을 열매로 맺어야 합니까? 다른 지체를 섬기는 것으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희생을 요구합니다. 여러분은 일주일간 일하고 교회에서조차 일하고 싶지 않을 것입니다. 봉사는 희생을 요구합니다. 주님은 ‘나는 너희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노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섬기는 자로 계신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수많은 천사들의 경배를 받는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바울이 자아를 이기고 자기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면서 성도들을 섬겼던 것은 주님의 본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 사도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자로 계신 주님의 모습을 본받는 것처럼 너희도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과 다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기억하셔야합니다. 제자들은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자신들 중 누가 크냐에 대해서 수없이 싸웠습니다. 아마 주님이 발을 안 씻기셨다면 제자들 가운데 서로 발을 씻기는 자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늘나라는 세상과 같지 아니하다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낮은 자가 되라고 여러 번 말씀하셨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가장 큰 자입니다. 그런 비밀을 알아야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들 사이에서는 낮아져서 섬기는 자가 큰 자입니다. 미국의 목회 세미나에서는 지방의 판사가 자원봉사로 목회자들의 구두를 닦았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낮춘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낮아질수록 높아지고, 높아질수록 낮아지는 것입니다. 그게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제 소망은 하늘나라에 갔을 때 유평교회 성도들 중 가장 큰 상을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숨어서 성도들을 섬기셨던 분들이 훨씬 더 큰 상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의 비밀입니다. 제가 35년가량 유평교회에서 사역을 하면서 얻은 결론은 새로 교회에 더해지신 분들 중 섬기려고 하시는 분들은 교회에 잘 융화되시지만, 섬김을 받으려는 분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섬기려는 분은 자신이 원하는 만큼 섬길 수 있고 그 기쁨이 더 큽니다. 섬김을 받을 때 기쁨이 큽니까? 섬기려고 할 때 기쁨이 더 큽니까? 섬길 때 기쁨이 훨씬 더 크고 오래 갑니다. 섬김을 받을 때 기쁨은 그리 크지 않고 늘 섬김을 받는 것에 목마릅니다. 우리의 신앙자세는 ‘나는 이 가운데 섬기는 자로 있노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는 구석구석 섬기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 분들에겐 하늘나라에서 큰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있다면 남은 삶을 섬기는 자로 살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두세 명, 수십 명, 수백 명이 모인 곳에서 내 자신을 섬기는 자의 위치에 둘 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늘나라의 법칙입니다. 사도바울은 교회가 물질로 사도바울을 도울 때 내가 물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너희의 상을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다른 성도의 섬김을 받는 것도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것을 돕는 것이기 때문에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항상 섬김을 받는 위치에 있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내가 섬김을 받는 것보다 섬기고 있는 것이 맞는 것입니다. 우리 몸의 지체도 서로 섬기고 있듯이 성도님들도 서로 섬기셔야 합니다. ‘나는 이 무리 중에 섬기는 자로 있노라’는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저는 섬기는 자들이 실망하는 것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섬김을 받는 자들은 때로 실망을 하지만, 섬기는 자들에게는 기쁨이 있고 하늘나라의 보상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주님을 섬긴다고 하면, 주님을 본받는다고 하면 오늘 이 말씀 속의 주님의 모습을 본받으시기 바랍니다.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7)”
그동안 유평교회에서 섬겨 주신 모든 성도님들의 노고를 주님께서 아시고 갚아 주실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내가 낮아질수록 높아지는 것입니다. 높지도 않으면서 높은 척 하는 것이 추한 것입니다. 아름다운 사람은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물질적, 시간적, 육체적 여러 방면으로 다른 사람을 섬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섬기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해주시고 그 보상을 하늘나라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도 놀랍게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메마른 것이 아니라 성도를 섬김으로써 기쁨과 평안을 누리는 삶입니다.
항상 성도들을 대할 때 내가 어떻게 하면 저 성도를 섬길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내 자아와 이기심을 쳐서 복종시키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이겨야 여러분은 신앙생활에서의 참다운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