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움의 근원

2006년 April 2일 ()

본문: 야고보서 4:1-6 |

주 제 : 싸움의 근원

 

본 문 : 야고보서 4장 1 - 6절

 

설교자 : 조성훈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사람들 가운데 있는 싸움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싸움의 근원』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참 많이 싸웁니다. 여기 계시는 분들 역시 수없이 싸우셨을 것입니다. 길을 가다보면, 운전하는 사람들끼리 멱살을 잡고 싸우는 일을 보게 됩니다. 또 집 밖으로 무엇을 던지면서 부부 싸움을 하는 것을 보기도 하고, 직장에서도 싸움을 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또한 국가와 국가끼리 싸움을 하고, 한 민족 안에서도 싸움을 합니다. 이처럼 사람은 싸움 가운데 살아갑니다. 평화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온통 자기들끼리 미워하고, 질투하며 싸움을 하면서 살아갑니다.

 

안타까운 것은 성도들 사이에서도 싸움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의 싸움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그들은 서로 크다며 싸웠습니다. 별 대수롭지 않은 갖은 이유들로 그들은 싸웠습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그러한 싸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여러 번 교회 안에서의 싸움에 대해서 언급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야고보가 이 글을 쓸 당시에도 교회에 싸움이 있었습니다.

 

싸움의 근원

 

야고보는 싸움의 근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정욕이 그 근원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있는 욕구를 이루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욕은 매우 강합니다.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이 나에게는 없고, 다른 사람에게 있을 때 싸우게 되며, 남들보다 더 좋은 자리에 앉기 위해, 더 좋은 대접을 받기 위해 싸우는 것입니다. 이러한 정욕이 구원받은 우리에게도 존재하기 때문에 싸우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와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았지만, 그것들이 다시 살아나 교회 안에서의 다툼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들을 돌이켜보시길 바랍니다. 교회에 와서, 또는 성도들 사이에서 기분이 안 좋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존심이 상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를 대접해주지 않기 때문에 상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육체의 정욕으로 인한 기분 상함입니다. 내 소욕을 이루기 위한 싸움이 교회에서까지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인생의 문제

 

항상 다른 사람이 나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우리를 화나게 만듭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얻고자 하는 만큼 얻지 못하고, 그래서 얻기 위해 투쟁해야 됩니다. 세상에는 평안이 없으며, 다툼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 나는 인정받지 못하는데, 다른 사람은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쁜 것, 이러한 모든 세상의 가치관이 교회 안에서 역사하는 것은 정말로 잘못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높아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낮아지기 위해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죽기 위해 싸우는 것이며, 더 가지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생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고달픈 일입니다. 불교에서는 ‘환생’을 말하는데, 이는 우리가 살아생전에 공덕을 쌓으면 다시 사람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자체가 매우 고달픈 일이기 때문입니다. 살아가는 동안에는 얻고 싶은 만큼 얻지 못합니다. 또 비교하게 됩니다. 그것이 우리의 마음을 어렵게 합니다. 성경은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에 큰 유익이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 주신 환경에 만족할 줄 아는 사람은 신앙생활에서 승리한 사람입니다.

 

교회에 나오는 많은 사람들이 모두 동등할 수는 없습니다. 자라온 환경이 다르고, 배운 것이 다르며, 사회적 지위가 다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남들보다 나아지기 원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에, 환경에 만족하고, 감사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섬기는 자가 큰 자임을 알고 서로 낮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우리의 마땅한 자세일 것입니다. 교회는 잘 살기 위해, 대접받기 위해 나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며 하나님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 나오는 곳입니다. 이러한 교회에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들어오는 것은 위험합니다.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 이러한 세상적인 가치관이 만연하다는 것입니다. 높음이 낮음이 되며, 낮음이 높음이 되는 성경의 원리를 파악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3절에서는 사람들이 그토록 시기하고 얻으려고 싸우는데 얻지 못하는 까닭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구하지 않기 때문이요, 자신의 정욕을 위해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내 자아의 만족을 위해,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구하기 때문에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또 그래서 얻지 못하기 때문에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과 벗하는 것

 

4절에서 말하는 ‘간음하는 여자들’은 성적인 범죄를 한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것 이외에 다른 우상을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나아가, 주님보다 세상을 더 사랑하는 것을 간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에 대해 또한 세상과 벗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원수 맺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요한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안에 아버지에 대한 사랑이 없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세상과 벗한다는 것은 세상의 정욕과 유행, 물질 등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살 수 없는데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과 벗 되고자 합니다. 세상에서 그런대로 성공한 삶을 살기 원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상식(생각)대로 살기 원하고, 그들의 유행을 따라가면서 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살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집에서, 좋은 환경에서 거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이 세상과 벗하는 이들의 관심사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세가 절대로 이러해서는 안 됩니다. 야고보는 분명히 말하기를, 이것은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신실히 섬겼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 또는 세상과 벗하는 그리스도인들과는 다른 삶의 자세를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어떻게 하면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였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관심사입니다. 어떻게 하면, 나를 통해서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실까, 내가 속한 가정, 직장, 사회에서 주위에 어떻게 하면 주님께 영광 돌릴까를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세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무시 받지 않고 대접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세상에서 보람되게 살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사이며,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한 자세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시기와 질투, 싸움 가운데 거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를 따라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고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인아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신 그리스도인의 원리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어, 그 안에 계신 성령님께서 시기하실 정도로 사랑하신다고 말합니다. 진정한 사랑에는 시기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어 이 땅에 내려오시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우리 마음속에 하나님이 첫째 자리에 있지 아니하고, 다른 것들을 사랑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기하시기까지 사랑하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 우리를 그토록 사랑하실까요? 제 안을 들여다 볼 때, 사랑받을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토록 나를 사랑하실까요? 내 속에 있는 영혼을 보시고 나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세상 사람들은 자기들이 원하는 것들을 위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웁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서로를 섬기기 위해, 낮아지기 위해 싸워야 합니다. 또한 세상에 마음을 두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게 두고, 나를 사랑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게 될 때,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과 싸움은 맞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과 시기, 질투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처럼 겸손하게 섬기는 자세로, 나보다는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에 우리의 관심을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관심은 어디에 있습니까? 다른 사람이 나보다 앞설 수 있도록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것이요, 그것을 주님께서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