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말씀

2007년 September 2일 ()

본문: 요한복음 1:1-5 |

주 제: 영원한 말씀

 

본 문: 요 1:1-5

 

설교자: 조 성 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서론

이 복음서를 기록한 요한에게 가장 어려웠던 점은 합당한 단어를 선택하는 것이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것은 마치 하루살이가 인간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살이가 인간의 발전된 과학과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그것을 그들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이 가진 언어로서 하나님의 세계에 대해 기록한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것입니다.

요한은 자신이 직접 만나고 경험한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은 20장 31절에 나타나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에 분명히 나타난 것처럼 요한은 두 가지 목적으로 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이 하나님, 또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기 위해서이고(요일4:14), 또 하나는 그것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요3:15,36). 그래서 우리가 전도할 때 주로 요한복음을 많이 추천하곤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원한다면 요한복음을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1절)

 

1절의 ‘태초’라는 말은 ‘시간 이전’,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기 힘들지만 분명 사실입니다. 손톱만한 컴퓨터 칩 안에 수많은 자료를 담는 것이나 핸드폰의 원리 등, 사람이 하는 일도 이해하기 힘든데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또한 사람이 연구하는 고래나 파리, 모기 등의 주제도 연구하기 어려운 주제인데 하나님은 오죽하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에 한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연구해 알 수 있는 영역에 계신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한 역시 하나님께서 밝혀주신 것에 근거해서 복음서를 쓸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성경은 그 시작이 없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시간 이전에 계셨고 말씀은 창조된 것이 아니며 영원 전부터 있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것을 말씀하셨을 때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요한복음 8장 56절을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이 50세도 안되셨는데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셨으니 사람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말인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과 대화하는 중에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순신 장군에 대해서 말하면서 “그 사람 태어났을 때 참 똑똑했었지”라고 말한다면 저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보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 말은 곧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세상을 창조하기 이전부터 계셨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신 분이고,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성령님께서 인도하셔서 이와 같은 말씀을 기록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또한 “태초에 말씀이 계시다”고 하며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은 항상 말씀으로 나타나십니다. 늘 말씀으로 역사하시고 말씀으로 그 백성들을 인도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은 익숙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장 3절에는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베드로후서 3장 5절에는 “이는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저희가 부러 잊으려 함이로다”고 하는데 이와 같은 의미로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있는 말씀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과 태초부터 함께 계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잠언 8장 27-31절 말씀을 보면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 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리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고 하는데 여기서 잠언의 기자가 말하고 있는 ‘나(지혜)’는 예수님을 비유적으로 가리킨 것입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신 말씀(1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는 말씀에서 예수님이 100% 완전하게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말씀)는 인간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는 육체 안에서 온전하신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인데 그렇기 때문에 성경은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없을 때 성경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이해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의 기원과 역사(2절)

 

2절에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알듯이 하나님은 삼위일체로 세 분이시고 동시에 한 분이십니다. “내가 세상을 창조할 때에 나와 함께한 신이 없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창세기를 보면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사람을 만들자”며 하나님 스스로를 복수로 말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은 세 분이시며 또한 한 분이신 것입니다. 2절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하나님이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말씀(3절)

 

3절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는 말씀은 놀라우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고 몇 시간을 여행해도 세상이 참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만약 우리가 머나먼 우주를 여행한다면 어떨까요? 또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건물에 올라가거나 큰 배, 큰 다리를 보면 “인간이 정말 대단하구나”하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주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 모든 것들을 안전하게 운행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면 어떻겠습니까? 사람은 풀 한포기 만들지 못하는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이 모든 만물을 지으신 분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천 평의 논이 있는데 그 논에 자란 벼를 각각 이름을 다 안다고 하면 얼마나 놀라울까요? 그런 일이 있기나 할까요? 하나님이 만든 온 우주의 모든 별을, 지구의 60억이 넘는 사람의 이름과 그의 성격을 아시고 그를 인도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은 얼마나 대단한가요. 성경에 보면 까마귀가 먹을 것이 없어 오락가락 하고 있을 때 그 먹을 것을 공급하는 이가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짐승, 사람, 온 우주를 감당하시는 하나님은 참 바쁘실 것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습니다. 세상 모든 것이 그의 것입니다.

 

말씀과 인간(4절)

 

4절에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빛이 없으면 세상엔 생명체가 없다고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고 한다면 온 우주 자체는 생명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고, 스스로를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은 누구든지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현재 살아있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영원히 흑암가운데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빛”이시므로 예수님께 가면 그의 길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5절의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는 말씀에 인간의 불행과 비극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빛이 비취고 있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영적으로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사람은 감각이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없고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며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은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과 받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보는 사람과 보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볼 수 있으나 어둠 가운데 있는 사람은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구원받고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과 다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은 예수님께서 하신 것이 나의 것이 되며 그분의 말씀이 깨달아지고 마음에 와 닿아 그와 같이 살게 됩니다.

 

사람에게 빛이 비춰지면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나게 마련인데 하나는 그 빛을 피하는 것입니다. 빛에 자기 자신이 드러나기 때문에 그것이 싫어서 도망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 빛에 나아와서 자신을 들여다보고 잘못된 것을 고칩니다.

 

결론

 

언젠가 기독교 신문을 읽는데 하용조 목사님이 연예인 교회에서 설교한 이야기를 읽게 되었습니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예수님에 대해서 설교를 하는데 그곳에 모인 어떤 사람이 그것을 믿지 못하고 계속해서 목사님에게 반발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그것을 보다 못한 한 집사님이 말하기를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도 믿었는데 당신은 왜 못 믿느냐”고 했다고 합니다. 그 말은 맞는 말입니다. 그 당시에 살았던 예수님의 증인들이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증거하고 있는데 우리가 믿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요한일서 1장 1-4절에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자니라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케 하려 함이로라”고 요한은 스스로 보고 듣고 만지고 경험한 것을 확신하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에 살았던 요한이 확신하고 증거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믿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론은 바로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인이고 나의 구세주 되시며 나와 함께 계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고 환경을 바라볼 때, 연약함을 발견하고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그 가운데 예수님이 계십니다. 나는 연약하지만 그 안에 능력의 하나님이 계십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 영원한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나는 내 양을 알고”라고 하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시고 그분을 더욱 신뢰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