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우리의 자랑인 십자가
본 문: 갈라디아서 6장 11-18절
설교자: 조 성 훈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 모양으로 장식도 하고 악세사리로 착용하기도 하는데, 그들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교회를 세우고 그 교회를 순수하게 하나님의 진리 안에서 지킨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가 점점 그 목적과 말씀에서 멀어져 가기 때문입니다. 예전에는 크리스마스가 되면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았고, 텔레비전에서도 성경과 관련된 영화를 상영하곤 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은 점점 하나님의 진리에서 멀어져 가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좋은 왕들이 세워져서 처음에는 온 나라가 하나님을 순수하게 섬기지만 시간이 흐르면 곧 그 순수함에서 멀어지는 것을 발견합니다. 교회사를 보아도 교회가 처음 세워졌을 때와는 달리 점점 변질되어 가는 모습을 봅니다. 오늘날 유럽과 미국 등에 있는 커다란 예배당들은 텅텅 비어있습니다. 한 때는 그곳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배하며 말씀을 선포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는데 그가 떠난 뒤 잘못된 교사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사도 바울의 사도권을 부인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으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복음을 변질시켜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 3:3)”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치 않게 하더냐(갈 5:7)”
오늘날에도 세상에는 교회를 부패시키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기 위한 거짓교사들이 있습니다. 진정한 선지자보다는 거짓 선지자가 많고 하나님으로부터 세움 받은 일꾼들보다는 사단으로부터 세움 받은 일꾼들이 더 많습니다. 어떤 이단은 한 교회 안에 신자들 몇을 심어두고 한동안은 잠잠히 교회 안에서 열심히 일하게 해서 성도들의 마음을 사게 한 뒤, 결국 교회를 뒤집어버린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세운 순수했던 교회가 점점 잘못되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그들에 대해 탄식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의 육체의 모양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6:11-13)”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를 두고 어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눈이 나빠서 이와 같이 썼을 것이라고 하고, 또 한편으로는 강조하기 위해서 이처럼 말한 것이라고도 합니다. 그들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것을 강조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순수한 복음을 지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있기 때문입니다.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 뿐이라(6:12)” 유대인들에게 할례 받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듭나고 영원한 구원을 얻는 것은 할례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던 할례는 약속을 저버린 그들에게 이제 형식적인 것일 뿐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침례를 받았기 때문에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지 않으면 그는 침례를 받았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이 아닌 것입니다.
순수하게 하나님의 복음에 기초해서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려고 하면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마련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말씀에 따라서 떡과 잔을 가지고 예배할 때 사람들은 왜 예배의 모습이 자신들과 다르냐며 따집니다.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신과 다른 것을 따지는 것이 사람들의 관심사입니다. 자신들이 하는 것과 비교해서 판단하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외형적인 형식에 메인 종교인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사단이 가장 원하는 것은 복음이 변질되는 것입니다. 순수하게 은혜로 주어지는 복음을 어떤 행위로 참여하게 만드는 혼합복음으로 만드는 것이 사단의 역사입니다. 오늘날 종교인들도 많은 유혹에 빠지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우리 스스로가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족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것이어야 하며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 원하시는 것이어야 합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나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는 것, 자신을 높이려는 것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왜 갈라디아 교회는 이 잘못된 가르침에 온 교회가 휩쓸렸을까요. 아마도 잘못된 가르침이 사도 바울이 말한 것보다 더 그럴듯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뭔가를 줘야 받는 것에 익숙하기 때문에 값없이 주어지는 복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 모릅니다. 오히려 할례를 받는 것이나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훨씬 이해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거짓교사들은 다른 사람에게 짐을 지우고 자신은 지지 않습니다. 또한 자신은 부하면서 성도들은 가난하게 만들고, 모든 영광을 자신이 취하는 사람입니다.
내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외에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이 세상 사람들은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짊어지기도 하고 자신의 죄를 종이에 써서 불에 태우기도 하며 수천 킬로미터를 삼보일배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들로는 절대 죄책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세상의 사단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선하게 살고 꼬박꼬박 십일조를 한다고 해도 사단의 권세에서 해방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만이 영원한 죄의 저주에서 여러분을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거듭날 수 있는 것,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뿐입니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었기 때문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흔히들 말하는 “나의 꿈”과 “나의 소망”은 죽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꿈과 소망을 말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우리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즐거움을 누리길 원한다면 그저 삶만 허비할 뿐입니다. 세상에 가서도 제대로 못살고 주님 안에서도 잘 살지 못하는 사람이 가장 불행한 사람입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꿈과 소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존귀함을 받으실까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나를 모든 죄에서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세상에 대해서도 못박아버렸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한 것입니다. 세상의 길을 막아버린 것, 이것이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세상의 모양을 내려거나 세상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의를 좇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좇아간 이스라엘은 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뇨 이는 저희가 믿음에 의지하지 않고 행위에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혔느니라(롬 9:30-32)”
이스라엘 백성들은 수백 년 동안을 말씀에 따라서 의에 이르기를 원했으나 결국 정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의롭게 되려고 했기 때문에 정죄에 이른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행위에 의지하지 않고 믿음에 의지했기 때문에 구원에 이를 수있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 교회가 다시 행위로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탄식한 것입니다.
내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6:17-18)” 사도 바울은 이제 더 이상 이와 같은 문제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도 갈라디아 교회처럼 변질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시작했으나 행위에 의지할 수 있고, 예수님의 십자가로 시작하였으나 자신이 주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점점 세상으로 다가갈 수 있고, 어떤 행위에 의지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신령하다는 생각에 빠질 수 있습니다.
순수하게 십자가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을 모든 죄와 사망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영원한 생명을 주었고, 세상에서 살려는 여러분을 영원히 못박아버린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그의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와 교회가 되어야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