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2006년 October 29일 ()

본문: 로마서 9:14-29 |

주 제 : 은혜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본 문 : 롬 9:14-29

 

설교자 : 조 성 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수 없느니라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그런즉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로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뇨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뇨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부요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찌라도 무슨 말 하리요 이 그릇은 우리니 곧 유대인 중에서 뿐아니라 이방인 중에서도 부르신 자니라 호세아 글에도 이르기를 내가 내 백성 아닌 자를 내 백성이라, 사랑치 아니한 자를 사랑한 자라 부르리라 너희는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저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부름을 얻으리라 함과 같으니라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뭇자손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찌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얻으리니 주께서 땅 위에서 그 말씀을 이루사 필하시고 끝내시리라 하셨느니라 또한 이사야가 미리 말한바 만일 만군의 주께서 우리에게 씨를 남겨 두시지 아니하셨더면 우리가 소돔과 같이 되고 고모라와 같았으리로다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두 가지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데,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를 미리 예정하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에게는 자유 의지가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을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를 우리가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예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정’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예정된 자를 부르셨으며, 또한 부르신 그들을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세상에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께서 나를 예정해주지 않으셨기 때문에 구원받을 수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정론만이 전부는 아니고, 다른 한편으로,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진리 중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요약해보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시기로 약속하셨고, 그 약속에 의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실 자들을 예비해두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선택받은 이스라엘

 

14절 이전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은 은혜로 된 것이지, 율법으로, 행함으로 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첫째로, 아브라함이 그 예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 의를 행했기 때문에 그를 이스라엘의 조상으로 삼으신 것이 아닙니다. 둘째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다 선택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하갈을 통해 난 이스마엘은 선택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이삭의 자녀들은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들이 어미 리브가의 뱃속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이미 어린 자를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뱃속에 있을 때, 누가 하나님을 더 사랑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인 것입니다. 아이가 조금 커서 보니, 한 아이는 예의가 바르고, 잘 컸고, 또 다른 아이는 성격이 이상해서, 그래서 괜찮은 아이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뱃속에서 일방적인 하나님의 의지로 선택한 것입니다. 행함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불의가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쓰레기를 태우려고 소각장으로 가서 버리다가, 그 중에 쓸만한 것이 있어서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럴 때, 그냥 버려지는 쓰레기가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죄인입니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의인이라고 가정해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천국에 보내시고, 또 어떤 사람은 지옥에 보내신다면, 그것은 불의한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지옥에 가야할 죄인인 사람들 중에서 어떤 사람은 바로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시기 위해 사용하시고, 또 어떤 사람은 구원하신다고 해도 하나님에게는 불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긴다.(1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어떤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그렇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지 사람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인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진노의 그릇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공의롭게 하신다면, 모든 사람을 지옥에 보내셔야지 맞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사도 바울은 “원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요 달음박질하는 자로 말미암음도 아니다.” 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자신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근거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예정’의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17절에서는 바로를 택하신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를 택하신 것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하심을 보이기 위해서였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기 위함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바로가 얼마나 강퍅했습니까? 그는 10가지 재앙을 당하고도,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까지 좇아가 죽이려고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쓰셔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전파하시기 위함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충분히 그러실 수 있는 분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의 죄를 징벌하시는 이유

 

19절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택하시지 아 않았기 때문에 안 믿는 것인데. 어찌 책임을 물으시는 것인가에 대해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토기장이의 비유를 듭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이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친히 쓸 그릇을 만드는 권이 없느냐(20-21)” 토기장이는 흙을 가지고 자기가 원하는 작품을 만듭니다. 어떤 그릇을 만드는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토기장이의 의지에 따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이 ‘예정론’에 대해 거부 반응을 보이고, 오해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어떻게 공의로우신 분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고, 어떤 사람은 버릴 수 있느냐고 반문하며, 또 은혜롭고 자비로우신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그 속성상 그럴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생각을 갖는 사람들이 ‘그렇다면, 즉, 구원이 사람들 개인에게 달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라면, 어찌해서 우리를 징벌하시는가? 그리하면, 하나님이 불의한 분이 아니신가?’, 또 ‘모든 것이 하나님께 달렸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토기장이의 예를 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

 

이 세상 사람들은 크게 두 분류의 그릇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엘리야가 바알 선지자들과 싸우고 난 뒤, 이세벨이 두려워 피난 갔을 때에, 엘리야는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의 종은 아무도 없고, 나만 혼자 남았는데, 나마저 죽이려고 합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내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 명을 남겨두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1:3-5) 하나님께서 칠천 명을 보호하셨던 것입니다. 구원 얻을 자들을 보호해 두신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말씀입니까?

 

지금, 이스라엘은 민족 전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들 가운데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 가족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택함을 입었을까요? 그 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신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고, 좋은 사람이라 택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은혜로 택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입은 것입니다. 로마서 11장 6-7절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고, 남은 자들은 완악하여 졌다고 말합니다.

 

이방인들에게도 적용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원리

 

그런데, 이것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 여러 곳에서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하나님의 이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 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으리라 하시더라(행28:28)”,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라(롬 11:13)”,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함을 면키 위하여 이 비밀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비밀은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게 된 것이라 그리하여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롬 11:25)”,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29-30)”,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로 다 믿더라(행 13:48)”,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우리로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함이라(엡 1:11-12)”

 

이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유대인들 중에서 구원할 자를 예정하시고, 이방인 중에서도 이방인들 중에서도 구원할 자를 예정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 어떤 자식도 그를 해산의 고통을 통해서 낳고, 젓을 먹이면서 기른 그 부모에게 나를 정말 사랑하냐고 따질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가 처하는 환경 속에서 때때로 하나님께서 날 사랑하시는지를 묻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세전에 택하셔서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 앞에 그런 이야기를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는 경험을 하고 기쁜 마음으로 주님께 돌아왔을 때, 주님께서는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에 계실 때,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그 나라를 주시기를 기뻐하시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한 하늘나라에 여러분이 가게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여러분을 예정하시고, 때가 되어서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눈을 열어 그리스도를 보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을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시고, 영원한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평생을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일이 우리에게 닥치더라도, 그것이 구원의 즐거움을 잃어버릴 만큼 큰 것은 없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성전에 올라갈 때, 앉은뱅이가 구걸을 했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주머니에 돈이 가득 있었는데, 그것이 아까워서 그렇게 이야기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예수 그리스도가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라고 여겼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구원받은 것, 그것보다 더 큰 복을 받은 자들은 없습니다.

 

결론

 

구원의 역사를 보면, 크게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나누어서 생각해 볼 수 있는데,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구원하신 것을 보면, 처음부터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아브라함을 택할 때도, 야곱을 택할 때도, 하나님을 배척하는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을 볼 때에도, 또 앞으로도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이 구원받을 것인데,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비롯된 것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또 하나는 이방인의 구원인데,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방인의 충만한 수’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이방인의 구원 역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으며, 하나님의 예정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고 하면, 우리는 도저히 구원받는 것을 생각할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감사의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이방인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구원받은 자의 수(數)가 있을 것입니다. 이제 그 수가 하나 하나씩 채워지고 나면, 그 후에 휴거가 있을 것이며, 그 뒤에는 이스라엘 중 택함을 받은 자들이 구원을 받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아직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시는 분들은 어서 회개하고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오늘 ‘예정론’ 쪽에서 살펴보았습니다. 다른 한편, 우리에게는 ‘자유의지’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둘 모두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정론을 살펴보면서,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를 구원해주셨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에 감사하는 삶을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