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인생의 즐거움
본 문: 시편 39편 4-7절
설교자: 조 성 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 뿐이니이다(셀라)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얼마 전 값비싼 오토바이를 탄 10여명이 떼를 지어 도로를 점령하며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름대로 참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유니폼을 멋있게 갖춰 입고 경주용 자전거를 타는 것이나 등산복을 입고 등산을 하는 것, 낚시를 가거나 고스톱을 치는 것 등도 사람들이 누리기 원하는 즐거움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고백
많은 사람들이 삶에서 즐거움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솔로몬도 “내가 무엇으로 내 육체를 기쁘게 할까”를 생각했습니다. 취미가 다 달라 어떤 것은 조금 더 고상하고 어떤 것은 그보다 조금 못할지 모르지만 그것을 통해 즐거움을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사람이 만일 생을 두 번 살 수 있다면 두 번째 삶은 이처럼 아등바등 살지 않을 것입니다. 좋은 대학 나온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70, 80세가 되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본문 말씀의 시편 기자는 인생에 대한 깨달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육체 뿐이라 가고 다시 오지 못하는 바람임을 기억하셨음이로다(시 78:39)”,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6)” 술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화롯불 가에서 좋아하는 술을 좋은 안주와 함께 한 잔 마시려고 하는 찰나에 꿈에서 깼다면 그 마음이 어떨까요. 그것이 바로 인생이라고 합니다. 복권이 당첨되어 막 쓰려고 하는데 꿈에서 깼다면 어떨까요. 인생은 꿈과 같아서 짧은 시간에 많은 일들을 하지만 결국 깨고 나면 남는 것은 허무함 뿐입니다. 옛날 어르신들이 어린 저에게 인생은 짧으니 세월을 아끼라고 하셨을 때 그 말이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저에게는 어서 어른이 되고 싶은 마음에 하루하루 시간 가는 것이 더디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젊은이들에게 옛날 어르신들과 똑같이 말하곤 합니다. 정말 살아보니 인생은 짧습니다. 헛된 일에 낭비할 시간이 없습니다. 또한 우리는 헛된 것들에 분요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힘들게 노력하는 것들은 알고 보면 정작 그렇게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세상은 우리가 그런 것들을 위해 인생을 허비하도록 만듭니다. 오늘날에 우리를 바쁘게 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돈 쓸 곳도 많고 유혹하는 것들도 참 많습니다. 인생으로 하여금 시간을 허비하도록, 진정한 의미 있는 삶을 살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만물의 피곤함을 사람이 말로 다 할 수 없나니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하는도다(전 1:8)” 우리의 눈과 귀는 만족함이 없어서 항상 더 나은 것을 원합니다. 결국 우리가 가장 편할 때는 잠 잘 때 뿐인 것 같습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 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이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느니라(롬 8:22-23)” 사도 바울은 이 말씀에서 구원을 받은 사람도 탄식하면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참다운 쉼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즐거움을 외적인 것에서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 역시 탄식하며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탄식하는 이유는 우리가 원하는 만큼 주님을 섬길 수 없고 육체가 연역하여 마음이 원하는 만큼 주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데서 옵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고통가운데 살아야 할까요. 주님은 “만일 네가 수고하고 힘들거든 나에게 오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이들이 그런 탄식 가운데 있는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대답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나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렘 2:17)” 원래 하나님께서 인생을 설계하실 때 인생이 고난 받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우리가 스스로 자취한 것입니다.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렘 2:19)”,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니라(렘 2:13)” 이것이 바로 고통의 시작입니다. ‘어디를 가야 더 큰 만족과 기쁨을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이지만 그들은 참다운 만족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의 노력
사람들은 자기의 삶의 만족을 얻기 위해 더 많은 물질, 권력 등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만족할 줄로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노력하고 투자하는 것입니다. 슬픈 것은 믿는 사람들 역시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세속적인 것들에 마음이 빼앗겨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회가 전체적으로 세속화되었고 세상의 가치관이 그리스도인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과 어린 성도를 돕는 것,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리스도인들의 기쁨이고 만족이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만나 교제할 때 점점 영적인 것이 사라져갑니다. 그들의 대화는 주님과 함께한 경험을 나누는 것이 아니라, 직장 생활이나 사업, 축구경기나 맛집에 대한 것들이 화제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즐거움은 주께 있나이다 우리의 소망은, 나의 만족도 주께 있나이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것들은 터진 웅덩이가 아닙니까.
하나님의 노력
하나님 역시 인생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애 3:33)”,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내가 아나니 재앙이 아니라 곧 평안이요 너희 장래에 소망을 주려하는 생각이라(렘 29:11-13)”, “무리를 보시고 민망히 여기시니 이는 저희가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유리함이라(마 9:36)” 예수님은 사람들을 보시며 울기도 하셨습니다(요 11:33-35). 사람들이 생명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떠나서 인간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그것으로 인해 고통당하는 것을 보시면서 주님은 마음 아파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하실 때 의도하신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즐거워하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시고 짐승을 만들어 보냈을 때 아담이 그들의 이름을 짓는 것을 보시며 기뻐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사람들은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싫어하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주님께 돌아온 사람들도 주님의 보화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다른 곳에서 만족을 얻으려고 합니다. 예수님을 만난 것은, 한 사람이 밭을 갈다가 지극히 값진 보화를 발견하고 돌아가 모든 소유를 팔아서 그 밭을 샀다는 비유와 같습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나와서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을 수 있냐고 했을 때 주님께서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고 와서 나를 좇으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돈이 많은 고로 심히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했을 때 그는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요한 역시 그물을 깁고 있다가 모든 소유 그물과 배, 가족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마태는 어떻습니까. 세금을 받다가 돈도 직장도 모두 버리고 주님을 따라 갔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데 자신의 모든 소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 모든 소유를 팔고 따라갈 만큼 주님은 가치 있는 분입니까. 혹시 주님을 믿고 따라간 뒤 팔았던 것들을 다시 갖추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모든 즐거움, 인생의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주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은 무가치합니다.
인간에 필요한 모든 것의 근원 되시는 하나님
인생의 즐거움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주님께 나아와 진정한 배고픔을 채울 수 있습니다. 혀가 이틀에 붙어 떨어지지 않도록 목말라 본 적이 있으십니까. 저는 예전에 수술을 하고 물을 한동안 못 먹었을 때 너무나 목이 말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느끼셨을 갈증을 실감한 적이 있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런 영혼의 목마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상을 택하고 어떤 사람은 취미를 통해서 배고픔과 갈증을 채우려고 하지만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 이외에 목마름을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의 만족과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영적인 것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대화가 영적인 것으로 바뀌고 우리의 기쁨이 주님을 따르고 순종하고 믿지 않는 영혼에게 전도하고 성도를 섬기며 봉사하는 데 있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서 얻는 즐거움이야말로 진정한 즐거움이요 진정한 만족입니다.
결론
주님 오심이 참 가까운 세상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점점 세속에 빠져서 영적인 회복이 더딥니다. 교회가 모이는 횟수도 적어지고 교회마다 모이는 숫자도 적어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갈수록 편한 것을 원합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에도 급급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여력이 없습니다.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여러분이 하실 일은, 교회에서 은사에 따라 일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즐거움일 때도 있지만 때론 마지못해 할 때도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즐거움으로 하기도 하고 부득불 해야 하기 때문에 하기도 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모든 집회에 빠지지 않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신앙이 살아남을 수 있고 잠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졸리면 얼마나 눈꺼풀이 무겁습니까. 우리가 잠자지 않으려고 해도 혼자서 신앙을 지키기는 어렵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성도들과 교제하며 모이기를 힘쓰고, 할 수 있으면 교회 안에서 일을 찾아서 일하면서 주님 안에서 다시 기쁨을 회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안에는 생수의 강이 있고 진정한 양식이 있고 참다운 만족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을 신실하게 섬겼던 사람들의 공통된 고백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