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문편] 6강 : 영원에 대한 고찰

2015년 March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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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과 영원에 대한 고찰

"사람이 죽으면 소멸되나니 그 기운이 끊어진즉 그가 어디 있느뇨"(욥 14:10). 수많은 장례와 죽음을 알고 있는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이 땅에 있는 그들의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또한 이 짧은 인생에 사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기기도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 무시하고 절대로 죽음을 맞지 않을 사람들처럼 생활한다.
물론 죽음을 무시한다 해도 사실은 절대로 변경시킬 수 없고, 다만 그에 대해 생각하는 고통을 잠시 피할 수 있을 뿐이다. 옛부터 사람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들 중에 하나가 "사후에 어떠한 일이 일어나는가?"이다. 그들의 사상은 다음의 몇 가지로 집약할 수가 있다.

우리는 소멸된다.
이것을 우리는 때로 "소멸"이라고 부른다. "당신이 죽으면 그것으로 끝난다."

2. 환생

사람이든 아니면 다른 형태로 다시 세상에 돌아온다. 아마도 이는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필요로 할 것이다.

3. 영교

죽은 영이 신비의 영계에 살아있어 이 땅에 살고 있는 자들과 접촉하기를 원하고 있다.

4. 아는 것이 불가능하다.

사후의 세게는 인간의 지혜의 한계를 초월한다. 사후에 생명이 있는지 없는지는 의문이다. 사후의 세계가 있는지 없는지 우리의 선행이나 운명을 믿고 기다려 보아야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상들은 성경의 가르침과는 맞지 않는다. 성경은 사람이 죽어 의식을 가지고 축복의 장소인(계 14:13) 하나님 앞으로 가든지(고후 5:8) 아니면 하나님을 떠나 고통의 장소로 가든지 둘 중에 하나로 간다고 말하고 있다.(계 20:10,15)

부활

"부활"이란 단어의 의미는 "서다" 또는 "일어나다"이다. 주예수 그리스도는 당시에 부활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오래 전에 죽은 자들에게 붙여진 하나님의 이름을 언급하면서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고(눅 20:37~38) 대답하셨다. 죽은 자에 대한 부활은 사도들의 가르침이 기본이었다.(행 1:22, 4:2, 17:18 23:6)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인이 500명이 넘는다고 말했으며(고후 15:4~8) 만일 부활이 없다면 그들의 믿음이 헛된 것이라고 말했다(15:12~17).

그러나 성경의 분명한 진리는 서로 다른 부활이 두 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단 12:2)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악인과 의인의 부활이 있으리라"(행 24:15하) 하나님의 심판에는 사람이 맞아야 할 두 가지운명이 있다. 하나는 두려움이요(히 6:2, 9:27) 다른 하나는 영원한 생명인데(요 3:16) 영원한 생명으로 인하여 사람은 심판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가 있다(요 5:24, 롬 8:1).

영원의 기간

성경에 있는 "영원", "영원한", "영원히" 등과 같은 단어들을 마치 어떤 제한이 있는 것처럼 가르치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그런데도 어떤 이들은 성경의 원어로 돌아가 그것이 단순히 하나의 "연장된" 또는 "한계가 일정하지 않은 기간"임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성경은 사용된 용어가 "세세토록"이라고 번역되기도 했어도 영원은 끝이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다음의 성구들은 "영원" 또는 "영원한"의 단어들이 그 용법에 있어서는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그 의미는 모두 같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 하나님께 적용된 경우

"영원하신 하나님"(롬 16:26), "영원하신 성령"(히 9:14), "그의 영원한 영광"(벧전 5:10), "영원한 능력"(딤전 6:16), "영원한 나라"(벧후 1:11)

2. 성도들의 장래에 적용된 경우

"영원한 속죄"(히 9:12), "영원한 구원"(히 5:9), "영생"( 요 3:16, 36), "영생"(눅 18:30), "영생"(요 3:15)

3. 불신자들의 장래에 적용된 경우

"영원한 불"(마 18:8), "영벌"(마 25:46), "영원한 멸망"(살후 1:9), "영원한 불의 형벌"(유 7)

"세세토록"이란 단어도 동일한 비교를 할 수 있다. 이 단어는 하나님과 그 보좌에 적용하여 사용되었다(계 4:9~10, 10:6, 15:7). 주와 함께 다스리게 될 성도들의 장래에 대해 사용되었으며(계 22:5), 영원한 형벌에 대해 사용되었다(계 14:11, 20:10).
"멸망"과 "소멸" 또는 "파멸" 등과 같은 어떤 단어들은 그 의미가 전멸을 의미하는 것으로 왜곡되어오고 있다. 그러나 사단이 멸망을 당하는 것은 분명하지만(히 2:14) 전멸되는 것은 아니다(계 20:10). 신자들이 서로 물고 먹음으로 망할 수는 있지만(갈 5:15) 그렇다고 해서 전멸되는 것은 아니다. 탕자가 망해간다는 것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인간으로 존재하지 않은 게 아니다(눅 15:17). 많은 불신자들이 영원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살후 1:9). 여기에서 말하는 영원한 멸망이란 존재가 소멸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들은 행복은 잃어도 존재가 소멸되지는 않는다.

불신자들의 상태

1. 예수님께서 묘사하신 것

예수님께서는 어떤 이들이 비유라고 말하는 한 부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다(눅 16:19~31).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를 비유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어떻든 비록 그것이 비유라 해도 이곳에 사용된 상징적인 용어들이 이 본문의 명백한 진리를 무효화시키지는 않는다. 구주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가르쳐주기를 원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그 교훈을 배워야 할 것이다.
1) 죽음 이후에 존재가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2) 그들의 영혼이 잠자거나 의식이 없는 게 아니다.
3)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4) 구원받을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5) 환생이나 이 땅에 다시 돌아오는 일이 없음
6) 불신자들에게 고통(형벌)의 끝이나 변화의 가능성이 없음
7) 성결의 목적이 없는 영원한 형벌만 있을 뿐임

2. 예수님의 보다 진전된 가르침

아래에 언급한 두려운 묘사들은 모두 사람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주신 주님이 주신 교훈이다. 주님은 그저 이 땅에 살면서 주님을 모른 체하거나 배척하는 자들이 받아야 할 사실에 대하여 묘사하셨다.
1) 꺼지지 않는 불 (마 3:12, 18:8, 막 9:44,48)
2) 세세토록 고난 당함 (계 14:11)
3) 바깥 어두움 (마 22:13, 25:30)
4) 슬피 울며 이를 갊 (마 13:42,50, 24:51, 눅 13:28)
5) 불못 (계 20:15)

영원한 형벌의 가르침에 대한 반대

이 달갑지 않은 교리에는 몇 가지 반대들이 있다.

이는 사랑의 하나님과 맞지 않는 이야기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 길에서 돌이켜 떠나서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겔 33:11) 주님은 자기를 배척한 성을 바라보시면서 우셨다(눅 19:41). 그는 정말 사랑의 하나님이시지만 그의 구원을 배척한 자들의 죄악은 깨끗케 하실 수가 없으시다(민 14:18).

2. 두려움에 호소하는 것은 바른 동기가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더 나은 동기가 될지는 모르지만, 중대한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비행이나 부상 심지어 매일의 삶에 대한 일반적인 예방책이 된다. 주님은 분명하게 하나님과 오는 심판을 두려워하라고 말씀하셨다(마 10:28).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지혜의 시작으로 말하고 있다.(잠 9:10) 성경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두려워할 만큼 두려워하라고 말하고 있다(벧전 2:17, 계 14:7, 15:4).

3. 하나님이 엄하시다는 것은 맞지 않는 말이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피할 길을 주신 하나님을 배척하고 회피하며 또 뒤로 미룬 자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그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는다 해도 그리 놀랄 필요는 없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하나님은 무한한 하나님의 사랑과 인내를 모독한 자들에게 그에 합당한 징벌을 요구하셨다.

구속함을 받은 자들의 상태

의인들의 최후의 상태는 위에서 언급한 불신자들의 상태와는 완전한 대조를 이룬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 16:11).

"자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이 복이 있도다"(계 14:13). 성도들은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본다(히 11:10). 이곳은 세상이 알고 있는 그 어떤 곳보다 좋은 곳이다.영원과 성도들이 거할 곳에 대한 보다 더 자세한 언급이 다음에 열거하는 성구들에 묘사되어 있다.

1.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곳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 14:3, 참고:17:24). 몸을 떠나는 것은 "주와 함께" 있기 위함이다(고후 5:8).

2. 변화된 몸으로 사는 곳이다.

그 몸은 주님의 몸과 같을 것이기 때문에(빌 3:21) 썩지 않을 것이다(고전 15:35~44). 우리도 주님처럼 서로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마 28:9,17, 눅 24:31, 39~40). 그리스도인들의 몸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 시에 있을 것이다(살전 4:15~17).

3. 그곳은 죽음이나 슬픔, 부르짖음, 아픔 그리고 삶을 어렵게 만들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곳이다(계 21:4).

4. 무한한 아름다움이 있는 곳이다.

"그 성은 정금인데 맑은 유리같더라"(계 21:18~21). 그곳은 온갖 보석으로 단장된 곳이다.

5. 더러운 것이나 거룩하지 못한 것은 전혀 들어갈 수 없는 곳이다(계 21:27).

구속함을 받은 자들이 거할 곳을 때로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하기도 하는데, 우리는 이를 하늘나라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오셔서 돌아가시기 전의 유대 신자들은 이를 "낙원" 또는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불렀다. 어떠한 표현이든 그곳은 모든 성도들이 사모하는 곳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죽는 것도" 유익하다(빌 1:21). 주님께서 십자가 위의 회개한 강도에게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고 말씀하셨는데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냐! 당신도 주님과 함께 그곳에 있게 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