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의 조찬

2010년 April 4일 ()

본문: 요한복음 21:1-14 |

주 제: 주님과의 조찬

 

본 문: 요한복음 21장 1-14절

 

설교자: 조 성 훈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 바다에서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나타내신 일이 이러하니라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과 또 다른 제자 둘이 함께 있더니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매 저희가 우리도 함께 가겠다 하고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이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날이 새어갈 때에 예수께서 바닷가에 서셨으나 제자들이 예수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 대답하되 없나이다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신대 이에 던졌더니 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육지에 올라보니 숯불이 있는데 그 위에 생선이 놓였고 떡도 있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잡은 생선을 좀 가져오라 하신대 시몬 베드로가 올라가서 그물을 육지에 끌어 올리니 가득히 찬 큰 고기가 일백 쉰 세 마리라 이같이 많으나 그물이 찢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저희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저는 어떤 형제가 미국의 대통령 조찬 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다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인 윌리엄 맥도날드 할아버지는 그의 나이 85세 정도 되셨을 때 어느 날 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하셨습니다. 앞치마를 손수 두르시고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를 하시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 날 함께 식사를 하면서 교제를 나눴는데 지금도 생각하면 참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식사를 함께 하는 것은 어떨까요. 본문 말씀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이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저는 최근 몇 번의 장례식을 치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과 죽음으로 인해 슬퍼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통계상으로 남자는 3명 중 한 명, 여자는 4명 중에 한 명이 암으로 죽는다고 합니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되며 자살하는 사람은 얼마나 됩니까. 결국 모든 사람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젊은 사람이 죽은 장례식은 슬픔이 많지만 나이 80이 넘은 사람이 죽은 장례식은 잔칫집 같습니다.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기 때문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가 죽음을 체념하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경우는 조금 다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주님의 하시는 일들을 보면서 놀라워했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장님이 눈을 떴으며 죽은 자가 냄새가 나도록 썩어가고 있어도 주님의 말 한 마디에 살아났습니다. 이 모든 기적을 친히 목격한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어떤 기대가 있었을까요. 이제 주님으로 인해서 ‘죽음’이라는 것은 끝났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대했던 주님이 힘없이 잡혀서 수많은 채찍과 고통을 당하신 후에 십자가에서 맥없이 돌아가셨을 때, 제자들의 실망은 얼마나 컸을까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하는 말을 보면, “예수가 우리를 구원할 구세주로 알았는데 죽고 말았다”며 실망의 마음을 내비쳤습니다. 그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도 실망이 컸을 것입니다. 마리아도 그랬습니다. 주님은 살아계실 때 자신이 부활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인간의 머릿속에는 사람이 살아난다는 것은 본 적도 들은 적도 상상해본 적도 없었던 일입니다. 제자들은 한동안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도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죽어 장례를 치르고 돌아왔는데 그날 밤 남편이 문을 열고 들어온다면 어떨까요. 놀라서 병원에 실려 갈 것입니다.

 

고기를 잡으러간 제자들

 

부활하신 후에 주님은 가끔 자신의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이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을 갈릴리로 보내셨습니다(마 28:7). 베드로는 예전에 자신이 하던 일을 하러, 즉, 고기를 잡으러 간다고 했습니다. 그는 아마 거의 3년 만에 고기를 잡게 된 것일 것입니다. 그가 고기잡는 분야의 일인자라는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그물을 내렸지만 그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밤새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

 

갈릴리 호수는 그리 큰 호수가 아니었습니다. 수년 동안 고기잡이를 해온 베드로에게 고기잡이가 어려운 일이었을까요. 그러나 그는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저는 종종 낚시를 하러 가는데 은연 중에 마음속으로 하나님께 기도를 하게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보다 더 많이 잡히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런 기대가 있지 않나요?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난 베드로는 그 마음속에 부활하신 주님에 대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마 어느 정도 고기를 잡으리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믿는 사람은 주님이 함께 계시므로 무언가 남들보다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이 살아계신 분이기 때문에 일이 잘 풀리리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밤새 한 마리의 고기도 잡지 못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얼마나 춥고 힘들었을까요.

 

주님의 명령과 주님을 알아본 제자들

 

날이 새어갈 때에 주님께서 “얘들아 너희에게 고기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누군지도 모른 채 제자들은 그 말에 순종했습니다. 밤새 그물을 내렸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어떤 사람이 말하는 것을 듣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말에 순종하여 오른편에 그물을 던졌을 때 고기가 가득했습니다. 많은 고기가 잡히자 요한이 “주님이다”라고 했습니다. 그 때 성격 급한 베드로가 뛰어내립니다.

 

주님과의 조찬

 

밤새도록 바닷가에서 그물을 내렸던 제자들이 얼마나 추웠을까요. 육지에 올라와보니 숯불이 따뜻하게 피워져 있었습니다. 주님은 얼마나 따뜻하신 분인지요. 그들이 배가 고플 것을 아시고 떡과 생선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은 아무 것도 잡지 못한 그들에게 고기를 잡는 즐거움을 경험하게 하시고, 또 그들을 위해 따뜻한 아침 식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따뜻한 불 가운데서 그 음식을 먹을 때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우리 주님은 부활하신 것을 확실하게 제자들에게 나타내셨습니다. 마리아에게도 나타나셨고 제자들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믿지 않는 도마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500여 명에게 일시에 나타나시기도 했고 사도 바울에게도 나타나셨습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신경 쓰시는 분입니다.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몇 명의 제자들을 위해 새벽에 불을 피우고 떡과 생선을 구워 따뜻하게 먹이신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주님은 제자들에게 섬김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뜻한 숯불과 떡과 생선을 밤새 수고한 제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주님의 따뜻한 마음씨를 생각합시다.

 

결론

 

저는 지난 30년간 목회를 해오면서 주님의 따뜻함과 온유함과 친절함을 수차례 경험하였습니다. 수없이 그물질을 했지만 밤새 잡지 못할 때가 참 많았습니다. 옆을 봐도 보이지 않고 앞을, 뒤를 사방을 봐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주님께서 따뜻한 고기와 떡과 숯불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나는 이런 주님이 나의 목자이신 것이 너무나 감사합니다. 나이를 먹고 주님을 더욱 알아가면서 생각하게 되는 것은 주님이 얼마나 멋있는 분인가 하는 것입니다. 환경이 항상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밤새 헛수고하고 나온 제자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주님의 따뜻한 배려와 위로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이런 것들을 경험하며 살아오지 않았나요.

 

이런 주님을 머지않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조찬 기도회에 참석하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언제가 될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주님의 조찬에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위해 수고한 이들을 의자에 앉히고 그를 위해 수종 들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이런 따뜻한 주님이 함께 계시다는 것이 얼마나 감동스러운 일입니까. 이런 주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나의 목자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