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본 문: 베드로후서 3장 14절~18절
설교자: 조 성 훈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우리 사랑하는 형제 바울도 그 받은 지혜대로 너희에게 이같이 썼고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미리 알았은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 굳센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찌어다"
저는 오늘 이 말씀에서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드리기를 원합니다. 주님을 아는 것에서 자라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며, 또한 정상적인 일입니다.
주 앞에 흠 없는 삶
사도 베드로가 14절에서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라고 말한 것은 앞선 구절(13절)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말씀에 다라 불타 없어질 세상에 대해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세상은 불타 없어질 것인데, 우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한지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이제 이 육체에서 해방되어 새 하늘과 새 땅, 즉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해주고 있는데, 베드로는 몇 가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14절)” 베드로는 우리에게, 주님께서 오실 때, 주님 앞에서 흠 없는 자로 나타나기에 힘쓰는 것을 삶의 목표로 삼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주님 앞에 온전한 자로 나타난다는 것보다 더 복된 일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나타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첫째로, 우리가 교리적으로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을 말합니다.잘못된 교리에 빠지지 아니하고, 순수한 하나님 말씀에 입각하여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도덕적으로 깨끗한 삶을 산다고 했을 때, 점도 없고, 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또한 그러한 삶을 살기를 힘썼던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행 24:16)”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도록 살기 위해 힘썼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우리 역시 양심에 거리낌이 없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청결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해야할 것이고, 그러기 위해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불순종하며, 도덕적으로 깨끗지 못한 삶을 산다면, 그분 앞에 섰을 때, 부끄러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이러한 우리의 경건한 삶에 대한 동기는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입니다. 이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삶을 돌아보게 하고 거룩한 삶을 살게 합니다(요일 3:3). 또한 우리로 하늘나라를 위하여 더욱 힘쓰게 하며(딤전 4:10), 성도들을 돌아보게 하고(히 10:23-25), 기쁨과 살아갈 이유를 가져다줍니다. 우리에게 있어 소망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흐트러지게 되는 시점은 주님의 오심에 대한 소망이 그 마음속에서 빛을 잃기 시작하는 바로 그 시점입니다. 소망이 우리 마음속에 확고하게 서 있을 때 우리의 삶은 흐트러지지 않으며, 절제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반면, 소망이 흐려지면, 우리 삶은 방종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과 인내
15절 말씀에서, 베드로는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 라고 말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말씀에서 두 가지 정도를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된 것과, 또 하나는, 주님께서 오래 기다리심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지금까지 주어졌다는 것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오래 참으시지 않으셨다면, 우리에게는 구원의 길이 주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땅 사람들의 배척도 참으셨고, 십자가의 고난도 모두 참으셨습니다.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던 것입니다. 또한 그뿐 아니라 주님께서 2000년 넘게 참으심으로 우리에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만일, 주님께서 천년만 참으셨다면, 여기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늘나라에 갈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주님은 계속해서 참으심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의 오래 참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래 참으심으로 우리의 구원이 되었던 것처럼,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도 인내는 반드시 필요한 덕목입니다. 주님과 우리 사이에서, 성도들 사이에서, 신앙생활 전반에 있어서 인내는 반드시 필요합니다. 성경에서 예를 들었듯이, 농부가 수확을 하기 위해서는 씨를 뿌리고 기다리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그러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삶의 고난 가운데서, 봉사에 있어서도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성경 해석의 문제
16절 말씀에는 성경 해석의 문제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읽다보면,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나옵니다. 베드로도 여기서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말씀에는 성경 해석을 하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른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성경 해석을 하다가 잘못된 길로 빠진 사람들은 수없이 많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의 구원을 행위의 구원으로 해석하여 죽을 때까지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다가 지옥에 가는 사람들이 세상에는 매우 많습니다. 또한 구원을 잃어버릴 수 있다는 생각으로 평생을 불안 가운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성경 해석은 너무도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난해 구절을 해석하는 것을 능력으로 아는데, 실제로 난해 구절을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베드로는 사도 바울이 쓴 것들 중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 때 당시에도 해석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면, 오늘날은 얼마나 더 하겠습니까? 그 어려운 것들을 억지로 풀려고 할 때, 많은 어려움이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이단들이 생겼고, 그리스도인들 역시 저마다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의미는 절대로 여러 가지일 수 없습니다. 제일 좋은 방법은 자기가 해석해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은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알 수 있는 것은 아는 것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이라면, 주님을 만날 때까지, 사도 바울을 만날 때까지 놔두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성경 구절을 다 빼놓더라도 우리는 충분히 잘 살 수 있습니다. 충분히 구원받을 수 있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성경을 올바로 해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성경 해석의 원칙은 첫째, ‘본문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상고하는 것이고, 둘째로, ‘그것이 당시 사람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가?’를 상고해야합니다. 성경은 나에게 쓰여진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에게 쓰여진 것이고, 그 다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그 교훈을 오늘날 우리들에게는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가?’를 상고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17절 말씀에는 미끄러짐의 유혹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서 우리에게 접근해 오는 것들은 너무나도 많습니다. 서 있는 것도 순간이요, 넘어지는 것 역시 순간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줄타기와 같습니다. 서 있다고 생각하면 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도덕적인 타락으로 넘어질 수 있고, 잘못된 교사들의 가르침으로 인한 교리적인 미혹으로 넘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환경이나 경제적인 문제들로 인한 미끄러짐의 유혹이 있으며, 형제 자매들과의 관계로 인해 믿음이 무너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시도를 결코 중단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시험할 때도, 사단은 잠시 떠났다고 말하고 있으며, 계속해서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또한 사단은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을 통해 우리를 공격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가장 많이 차지하고 있는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 자식들, 부모님, 친구를 통해서 공격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가장 연약한 부분을 공격합니다. 한 번 찔렀을 때, 중상을 입을만한 부분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돈에 약한 사람은 돈에 대한 생각만 그에게 계속해서 집어넣습니다. 성적인 유혹에 약한 사람은 성적인 유혹으로, 권력에 약한 사람은 권력으로 넘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단이 우리의 어느 부분을 공격해오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을 무너뜨리는 모든 것들에 대해 우리는 경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 안에서 자라감
사도 베드로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고 말합니다. 주안에서 자라간다는 것은 먼저, 주님을 지적인 면에서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믿은 지 수십 년이 되어도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약속을 믿고 따라가는데, 그분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님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 확고하게 자리잡혀있을 때, 우리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와서 ‘당신이 아는 그 사람 나쁜 사람이다.’ 라고 말했을 때, 내가 그 사람을 잘 알면, ‘그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잘 모르면, 의심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 더 잘 알게 될 때, 그분에 대한 신뢰를 더욱 굳게 할 수 있고, 우리의 모든 유혹을 물리칠 수 있으며, 그분을 위해 살고 싶다는 강한 욕구가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 주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체험적으로 주님을 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그분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얼마나 신실한 분이신지를 경험을 통해서, 또한 성경을 통해서 알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과 동행함으로 주님을 알아갈 수 있으며, 다른 성도들의 삶에 역사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통해서 그분을 알아갈 수 있습니다. 또한 말씀을 직접 순종하는 것을 통해서도 체험적으로 알아갈 수 있습니다.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그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체험적으로 주님을 충분히, 많이 알았습니다. 반면, 오늘날 우리가 시험에 약하고, 주님을 바라보는 소망의 희미한 것은 그리스도를 지적으로나, 체험적으로 잘 알지 못하는 데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던 다윗처럼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면서 살아가야할 것입니다.
결론
사도 베드로는 우리에게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하나님 앞에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말합니다. 또한 성경 해석의 문제를 언급하며, 억지로 풀지 말고, 이해할 수 있는 것만을 이해하고, 그 말씀을 순종함으로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만, 많은 유혹에서 우리 자신을 지킬 수 있게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을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얼마나 가까이 동행하고 있습니까? 주님을 아는 길은 성경을 상고함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그럴 때, 그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주님을 깊이 알아가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