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2005년 February 20일 ()

본문: 고린도후서 4:7-18 |

본문말씀: 고린도후서 4장 7절 - 18절
주제 :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
설교자: 조성훈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핍박을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그런즉 사망은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생명은 너희 안에서 하느니라 기록한 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모든 것을 너희를 위하여 하는 것은 은혜가 많은 사람의 감사함으로 말미암아 더하여 넘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매우 귀한 보배, 복음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질그릇 안에 있는 보배"라는 주제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길 원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생을 통해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미친 것 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사도 바울과 같은 부르심을 입진 않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의 삶의 많은 부분, 즉 그의 가치관이나 자세 등 여러 가지 모습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볼 때, 때때로 한 매력적인 남자에게 마음을 많이 뺏긴 한 여인의 모습을 떠올리곤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의 모든 삶과 마음을 빼앗겨 버린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 주어진 임무는 복음 전파입니다. 앞부분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한다고 말하고 있고,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웠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참 불행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쉽게 전했는데,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이 있다면, 그들은 망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사람은 모두가 다 망한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애타게 그리스도를 전하기 원했던 까닭은 복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시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 복음이 들려졌어도 그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면, 그것은 사단이 그것을 빼앗아 가는 것이요, 또한 그는 결국 망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첫째로, 우리가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몸을 가리켜 질그릇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매우 값어치 없는, 흙으로 만든 단순한 그릇이 바로 자신의 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릇' 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사도 바울은 이 가치 없는 질그릇에 보배가 들어있다고 말합니다. 사람도 다들 똑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는데, 그 육체라는 그릇에 어떤 사람이 살고 있느냐에 따라 천하게 보이기도 하고, 귀하게 보이기도 합니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속에 무엇이 담겨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용이 가치 있어야 그릇도 함께 가치 있는 것이며, 내용이 가치 없는 것이라면, 그릇도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가치 없는 질그릇 안에 보배가 들어있다고 했는데, 그 보배는 바로 복음을 말합니다. 복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있으며, 그의 사역이 있고, 아버지 하나님이 있습니다. 즉 모든 것이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놀라운 것이고, 사도 바울은 이를 보화, 보배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돈을 주고 살 수 없는 것이 바로 복음인 것입니다. 요약적으로 말해,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위해 돌아가시고, 장사지낸 바 되었다고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신 것을 믿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은 그 내용을 전한다기보다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살아있는 인격체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복음을 거절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입니다. 또한 복음 안에는 하나님의 모든 축복과 약속이 들어있고, 모든 영적인 부가 들어있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복음을 받아들일 때, 모든 축복과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복음을 귀한 보배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만든 반도체들은 세계 최고의 수준이기 때문에 외국으로 수출할 때의 값은 금보다도 더 비쌉니다. 그래서 매우 조심스럽게 외국으로 배달을 합니다. 그것은 반도체가 매우 가치가 있는 것이기 때문에 중요하게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얼마나 더 가치가 있습니까? 반도체와는 비교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갖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가치를 잘 알지 못하지만, 사람들이 그 가치를 인식하지 못하더라도 복음은 굉장히 가치 있는 것이고 이를 안 사도 바울은 그것을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복음을 위한 고난
그런데, 문제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 중요하고 가치 있는 복음을 그 안에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당하게 되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귀한 것일수록 사람의 위험을 받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따라서 귀한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당연히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다고, 즉 포위되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장 8, 9절 말씀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일 가운데 살 소망까지 끊어졌었다고 말합니다. 또한 디모데후서 2장 9절 말씀에는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라고 말합니다. 복음이 증거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이 시도한 것은 수도 없이 많습니다. 감옥에 가두고, 때리고, 위협을 주며, 때로는 굶주리게 하고, 강도의 위험 등 수 없이 많은 위험을 당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퍼져나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현재,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위해 살 때, 우리 역시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또한 답답한 일을 당했다고 말합니다. 인간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결코 복음 전하는 일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저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때때로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모세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았습니다. 틀림없이 사도 바울도 그런 경험을 아주 많이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도 바울도 육체를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에 몸이 너무 힘들기도 하고, 때로는 형제들의 송사가 너무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많은 일들로 인해 그도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었겠지만, 사도 바울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고,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신앙 생활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는 길과는 정 반대의 길을 가야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우리 몸에 베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을 이기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것입니다. 이번에 미얀마를 방문했을 때, 미얀마의 목회자님들에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점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들은 여러 가지를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목회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것은 바로 제 자신이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제로 신앙 생활을 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 육체가 우리를 얼마나 못살게 굽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려고 마음을 먹고 새벽에 눈을 뜰 때 '조금만 더 자자.' 등의 많은 생각들이 우리를 괴롭히지 않습니까? 또 경건의 시간을 갖고 보는 것을 조심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면, 또 그 날은 왜 이렇게 보이는 것이 많은지... 우리의 육체는 너무도 우리를 괴롭힙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 7장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사도 바울은 초인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실컷 두들겨 맞았을 때 기분이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 때, 핍박이 있기 마련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영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면 핍박을 받게 되어있습니다.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육체가 핍박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신앙생활이 쉽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그만한 대가가 지불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 생활에 대한 보상을 반드시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를 보좌에 앉히고 시중 들게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 생활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님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세상에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리들 가운데서 양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좋은 꿈만을 꾸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신앙 생활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늘 다시 일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바로 오뚜기와 같은 삶입니다. 저는 한 때 사단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니가 나를 수 없이 넘어뜨리겠지만, 나는 다시 일어날 것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때때로 넘어지기도 하지만,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돌을 맞아 사람들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버렸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시 일어나서 성 안에 들어가 다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이 복음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에는 사람을 영원토록 살리는 놀라운 힘이 있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포기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문 말씀에서 말하기를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지니고 다닌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10, 11절에는 그 이유에 대해서 잘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사도 바울의 육체에 잘 나타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날마다 죽음의 유혹 가운데 살아갔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의 삶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타나길 원했던 것입니다. 또 다른 말씀을 살펴보면, 사도 바울이 될 수 있으면 그가 고난 가운데 있기를 원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우리와 정말 다른 점입니다. 그러한 사도 바울의 삶 때문에 정말 많은 교회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가 죽음 가운데 일했기 때문에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생명을 얻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 없이는 복음은 전파되지 않습니다. 항상 순교자들이 있는 곳에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부흥됩니다. 죽음이 있는 곳에 복음이 많은 씨앗을 뿌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삶의 이유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왜 그런 삶을 살았을까요? 그 다음 말씀이 이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기록한바 내가 믿는 고로 말하였다 한 것 같이 우리가 같은 믿음의 마음을 가졌으니 우리도 믿는 고로 또한 말하노라" 구약의 사람들이 그러한 삶을 살았던 것은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을 신뢰했기 때문인 것처럼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에 그러한 삶을 산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든 신앙 생활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에 기초합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할 때, 신앙 생활은 할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신뢰하기 때문에 또한 그 말씀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구원과 약속 등 모든 것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서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왜 기뻐합니까? 그리스도의 말씀을 신뢰하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한 삶을 산 이유가 본문 말씀에 몇 가지 더 나옵니다. 16절 말씀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는 우리 육체가 날마다 쇠퇴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참 즐거운 것은 우리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 나라에 갈 날이 점점 가까워진다는 것을 말하는데, 그래서 우리 속사람이 날로 새롭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또한 17절 말씀에는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라고 말하고 있는데, 사도 바울이 이러한 말을 했다는 것은 놀랍습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고난이 얼마나 큽니까? 그런데 사도 바울은 그가 받은 고난이 매우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는 우리가 하늘에서 받을 영광에 비해서 매우 적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늘 나라와 이 땅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은 부자라도 이 땅의 모든 것을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 나라에 가면, 이 지구라는 별은 아주 적은 먼지에 불과합니다. 신앙인들의 특징은 바로 이 땅에서 있는 잠시의 낙을 누리지 않고, 또한 고난과 시련을 하늘에서의 영광과 비교해서 작은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았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사도 바울이 환난을 더 받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게 함이라" 그가 고난을 받기 원했던 것은 그 고난을 통해서 더욱 주님을 알 수 있었고, 또 하늘 나라에서 더 큰 영광을 받는다는 것, 또한 그것이 주님을 기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 즉 영적인 눈이 띄어진 사람은 그러한 것들을 알고 그것에 자기 인생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그리스도인들이 돌아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에 따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그것이 이 땅에 속한 것인지, 아니면 하늘에 속한 것인지를 판단해서 선택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땅의 것은 잠깐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어떻게 살았던지와 상관없이 인생의 끝에서 나오는 말은 수고와 슬픔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 보이지 않는, 오는 세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이 투자하는 것은 이 땅의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이 영원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에 투자하는 것입니다.
만약의 경우에 예수님께서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머지 않아 하늘 나라에 가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오실 징조는 현재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가 저녁 하늘이 붉으면 내일 날이 좋으리라 말하고, 어떻게 이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 오늘날 주님께서 오실 징조들이 세계 각처에서 일어나고 있음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주님께서 오실 날이 얼마나 가까이 임박했는지 잘 모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이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덫과 같이 그 날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결론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을 귀한 보배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그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의 모든 수고와 슬픔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때로는 사방에 포위 당하기도 하고, 어느 때는 답답한 일을 당하며, 불신자들에게, 심지어는 믿는 자들에게까지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복음을 위해 그러한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목적, 즉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과 일치합니다. 물론 우리가 상을 위하여 살지는 않지만,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보상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디를 보고 사느냐에 따라 우리 삶이 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감사한 것이 있다면, 우리의 고통도 이제 머지 않아 끝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는 영원한 삶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마음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러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가까이해보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에게 점점 빠지게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주님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고, 사도 바울처럼 주님을 위해 살 수 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의무감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우리에게 하늘 나라에서 영화롭게 해주시는 것을 생각할 때, 사도 바울은 그렇게 살 수 밖에 없었고, 또 세상에서 죽어 가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할 때,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많은 고난을 받아서라도 주님께 영광을 돌리기를 원했고, 또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는 가치관이 달랐기 때문에 보는 것도 또한 달랐고, 복음 전하는 일에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영원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육의 눈과 영의 눈을 가지고 있는데, 영의 눈이 밝지 않으면, 사도 바울이 본 것과 같은 것들을 볼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 눈이 밝은지를 확인해보시길 바랍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은 믿음의 눈 밖에 없고, 영적인 눈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내일 사먹게 될 음식을 상상하며 군침이 도는 것처럼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을 실질적으로 갖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은 보는 것을 따라 삽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살 때, 우리의 마음 속에 참다운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 그리스도가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보배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되길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과 시련을 겪은 이유는 그 안에 있는 보배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우리 안에도 그러한 보배가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신 분들은 눈을 열어 이 보배를 볼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가 오실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믿음의 눈을 가지고 복음과 그리스도를 위하여 남은 날을 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