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천국의 법칙
본 문: 요한복음 9장 39-41절
설교자: 조 성 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에 부딪치기도 하고 영적 성숙에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늘나라의 법칙을 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교회에 더해지면 그는 이제 완전히 다른 세계에 들어오게 됩니다. 교회는 세상과 다릅니다. 세상은 마귀에게,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세상의 생각을 가지고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될 때 그는 영적으로 많은 혼란을 겪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는 하늘나라의 법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보지 못하는 자들과 보는 자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바리새인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소경인가” 하니, 주님께서는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경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이 병든 것을 안다면 의사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마 9:12). 주님은 바리새인들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분명히 앞을 못 보는 사람인데 자신은 앞이 보인다고 한다면 어떨까요. 그를 도와 줄 수 있을까요.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복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주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본다고 말하는 사람은 사실 보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이 영적인 소경이라고 생각하는 자는 주님의 은혜로 눈을 뜰 수 있지만, 자신이 소경이 아니라고, 다 본다고 말하는 사람은 눈을 뜰 수 없습니다. 주님께 나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보는 자들의 죄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40)” 바리새인들은 자신이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것은 육적인 소경이 아니라 영적인 소경입니다. 영적으로 눈을 뜬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상태인가 하는 것을 알 것이고 지옥과 하늘나라를 볼 것입니다.
제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때 죄에 대한 예를 들면서, 친구가 복권에 당첨되었다면 마음 속에 시기심이 들지 않겠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의 대답이 친구 사이이기 때문에 괜찮다, 시기심이 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는 자신의 상태를 알지 못하거나 정직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여기 소경이면서 본다고 말하는 사람과 같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소경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이 만일 자신이 소경인 것을 알았다면 주님께 구했을 것입니다.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라는 말은 자신의 상태를 알고 주님께 나왔으면 주님께서 구원해 주셨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 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요 4:10)” 본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소경된 사람입니다.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는 말은 죄사함 받을 가능성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늘의 법칙
교회 안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는 이유는 하늘나라의 법칙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주님을 섬기고 영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법칙을 잘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법이 아닌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하늘의 가치관이 통하는 교회를 만들기를 원합니다. 교회가 또 다른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제 1법칙은 “자기를 낮추는 자가 큰 자”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은 자입니다. 세상의 법칙을 가져와서 교회 안에서 높아지려고 하는 사람은 낮아지게 되고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주님이 교회에 오신다면 식사시간에 밥을 가져오라고 하실까요. 제자들이 서로 누가 크냐 하는 것으로 싸울 때, 대야에 물을 가져오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던 주님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마 18:4)” 교회에서 생활하실 때 이 법칙을 알지 못하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죽으시면서 세상의 많은 벽을 허무셨는데 그 첫째가 유대인과 이방인의 벽이었습니다. 또한 종과 주인의 벽이 무너져서 교회 안에서 동등한 형제요 지체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돈이 많으냐 적으냐, 많이 배웠느냐 적게 배웠느냐 하는 것에 따라 대우가 다르지 않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은 자입니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말하는 사람 중에 성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보고 평가해 보십시오. 정직한 사람은 자신 안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고백합니다. 마음 속에 시기가 있고 욕심이 있습니다. 자신의 상태를 알면 자신을 높일 수가 없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눅 14:11)”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다른 사람을 가르칠 만큼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중에 실제로 성숙한 사람은 없습니다. 교회의 목자들이 하는 일은,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골라내고, 그들이 자신이 성숙하지 못했다고 생각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하늘나라의 가치관이 통하는 곳이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했고 부자라고 교회 안에서도 그런 것은 아닙니다. 세상에서 돈 많은 사람이 하늘나라에서 부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택하실 때에도 사람들이 못 배웠다고 하는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법칙이 세상의 법칙과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교만하지 않고, 주님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성숙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자신을 드러낼 것입니다. 우리는 다 그리스도 안에서 다 똑같은 종, 노예입니다. 종이 아침에 상전이 시키는 일을 듣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거부할 수 있을까요. 종에게는 오로지 복종만 있을 뿐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와 같은 하늘나라의 법칙을 통한다면 자신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는 것을 해야 합니다.
모세와 사도 바울의 예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좌우로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죽여 모래에 감추니라(출 2:11-12)” 모세는 왕자이고 권력과 힘이 있으니 유대인들을 도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유대인들을 구출할 수 있는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세를 광야로 보내십니다. 그곳에서 오랫동안 훈련을 시키십니다. 이 후에 모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출 3:10-11)”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모세는 이제 비로소 자기 자신을 올바로 알게 되었습니다. “저에게는 자격이 없지만 주님이 하라고 하시면 하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롬 7:18)" 사도 바울의 고백입니다. 사도 바울의 구원받기 전에 자신이 율법적으로 흠이 없다고 말할 때 그의 마음속에는 평안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교만했던 사도 바울이 주님을 만난 이후에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고 고백합니다. 자신을 비로소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 자신을 안 사람은 자신을 드러낼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 것 외에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이것이 진실로 성숙한 자의 말입니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고전 15:8-9)" 사도 바울처럼 고생하고 수고한 사도가 또 있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 고백했습니다. 이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성숙한 자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이 종인 것을 아는 사람은 사람들에게 대우를 받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습니다. 노예는 사실 사람이 아닌 재산인 것입니다. 죄의 종이었던 우리를 주님이 사셔서 하나님의 종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하는 것, 사람의 평가가 아닌 하나님의 평가를 기대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입니다.
결론
교회는 하나님의 법이 통하는 곳입니다. 주님께서 허무신 벽이 교회 안에 세워지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성숙하고 싶으시다면 자신을 낮추십시오. 자신을 낮추는 자는 높아지고 높이는 자는 낮아질 것입니다. 하늘나라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법칙은 아침 9시에 와서 일한 사람이나 12시에 온 사람이나 저녁 5시에 온 사람이나 다 똑같이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나라의 법칙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지고 있던 것들을 포기해야 합니다. 이곳은 다른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일에서든지 사람이 영광을 받아서는 안 되고 주님이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우리가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을 때 비로소 주님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종이고 주인이 쓰시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주방에 있는 그릇과 컵들이 서로 싸우는 모습은 상상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사람은 자신이 종인 것을 아는 사람이고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이 아닌 주님이 원하는 것을 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낫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정한 영적 성숙은 자신을 바로 알고 자신이 받은 은혜에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성숙하고 싶으시다면 하늘나라의 법칙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