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제 : 하늘나라의 소망
본 문 : 요한복음 14장 1절~3절
설교자 : 조 성 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주로 이 땅에서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축복을 많이 받으며 행복하게 잘 살 수 잇을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강대상에서 전해지는 설교들 역시 그런 것들에 대한 것이고, 그리스도인들의 많은 간증들 역시,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물질적으로 많은 축복을 주셨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물질에 많이 집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것은 이와 다릅니다. 성경은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늘나라의 가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소중한 것들은 모두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첫째로, 아버지가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또 우리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둘째로, 주님이 하늘나라에 계십니다. 제자들이 보는데서 하늘로 오리우신 주님께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로, 먼저 간 그리스도인들이 하늘나라에 있습니다. 여러분 주위에서 주님을 믿고 하늘나라에 간 많은 성도들이 그곳에서 쉬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믿음의 선진들을 우리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넷째로, 우리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고, 우리의 기업과 시민권이 하늘에 잇습니다. 또한 우리의 보상 역시 하늘에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대한 우선순위
우리의 모든 것이 하늘나라에 있는데, 도대체 왜 우리는 이 땅에 매여 있을까요? 외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와서 자신의 고향은 잊고, 한국 사람처럼 살고, 돈도 흥청망청 쓴다면, 그 사람의 삶은 정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이 땅에 매여 있는 삶을 살고 있다면, 이 역시 올바른 삶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늘에 대한 소망으로, 하늘나라에 대한 기대로 마음속에 기쁨이 충만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고후 4:17-5:1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ㄴ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우리가 이 땅에 있는 시간이 길지 잠깐이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몸을 가지고 사는 시간이 길지 않고, 이제 곧 하늘나라에 가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인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이 세상을 떠나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정말 잠깐입니다. 7,80년의 인생은 정말로 금방 지나갑니다. 하지만, 우리가 앞으로 하늘나라에서 누리게 될 삶은 영원한 것입니다.
또 지금 우리의 몸은 날로 후패하는 몸이지만, 하늘나라에서의 우리의 몸은 늘 최고의, 신령한 몸입니다. 고후 4:18에서는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라고 말하는데, 이는 우리의 몸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해가고, 우리가 하늘나라에 가게 될 날이 날로 가까워진다는 말입니다. 영원한 소망을 가지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기뻐하지만,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죽음이 두려워지고, 서글퍼지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죽음을 앞둔 90살 노인에게 로또 당첨은 기쁘면 얼마나 기쁜 것이겠습니까? 좋은 차를 사도 운전할 수 없고, 아무리 비싼 음식도 맛이 없고, 돈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좋아할 여자도 없을텐데, 기쁘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에게는 다른 소망이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소망이 있고, 모든 것이 날로 새롭습니다. 이는 우리가 이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나라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실망을 하려거든 세상을 바라보고, 절망을 하려거든 자신을 바라보고, 힘을 얻으려거든 주님을 바라보라.” 우리 주위의 환경을 바라보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 하나 쉬운 것이 없고, 사람들은 서로 시기, 질투를 합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또 나 자신을 바라볼 때는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주님을 섬기지 못하고, 원하는 만큼, 선을 행하지 못하며, 원하는 만큼 하늘나라와 그 영광을 위해 살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게 힘주시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바라보며 힘을 얻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후 5:6-7에서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보이는 것을 따라 살면, 헛되이 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믿음에 따라 살 때,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되고,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하늘나라는 과연 어떤 곳일까요? 성경은 하늘나라가 셋째 하늘에 있다고 말합니다.(고후12:2) 첫째 하늘은 우리가 보는 하늘을 말하는 것이고, 둘째 하늘은 지구와 같은 별들이 있는 우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 하늘은 거룩한 천사들과 하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합니다.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다 한들, 과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해도 우리는 우주 중에서 지구와 가까운 달과 화성에만 가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부활한 후 새로운 몸을 입게 되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셋째 하늘과 첫째 하늘을 오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만일 우리가 하늘나라에 갔다올 기회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그곳을 바라보며, 기쁨 가운데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님의 인도로 그곳을 다녀왔고, 그래서 그것에 대하여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은 하늘나라에 대해서 말하기를 높고 거룩한 곳이라고 말하고 있고,(사 57:15) 신약성경에서는, 주님께서 충성스러운 자의 이름은 하늘나라, 즉 새 예루살렘 성에 기록하리라고 말하고 있고(계 3:12),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마 5:16, 요 6:51)
한편, 성경은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영역을 ‘하늘나라’라고 말합니다. 물론, 장소는 하늘에 있는 것이지만, 영역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하나님께서 지배하시는 모든 영역이 하늘나라라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하늘나라의 모습은 어떠한가?
우리는 하늘나라에 대해서 다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 하늘나라의 일부분에 대해 조금 알게 될 뿐입니다. 에스겔서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보니 북방에서부터 폭풍과 큰 구름이 오는데 그 속에서 불이 번쩍번쩍하여 빛이 그 사면에 비취며 그 불 가운데 단쇠 같은 것이 나타나 보이고 그 속에서 네 생물의 형상이 나타나는데 그 모양이 이러하니 사람의 형상이라 각각 네 얼굴과 네 날개가 있고 그 다리는 곧고 그 발바닥은 송아지 발바닥 같고 마광한 구리 같이 빛나며 그 사면 날개 밑에는 각각 사람의 손이 있더라 그 네 생물의 얼굴과 날개가 이러하니 날개는 다 서로 연하였으며 행할 때에는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그 얼굴들의 모양은 넷의 앞은 사람의 얼굴이요 넷의 우편은 사자의 얼굴이요 넷의 좌편은 소의 얼굴이요 넷의 뒤는 독수리의 얼굴이니 그 얼굴은 이러하며 그 날개는 들어 펴서 각기 둘씩 서로 연하였고 또 둘은 몸을 가리웠으며 신이 어느 편으로 가려면 그 생물들이 그대로 가되 돌이키지 아니하고 일제히 앞으로 곧게 행하며 또 생물의 모양은 숯불과 횃불 모양 같은데 그 불이 그 생물 사이에서 오르락 내리락 하며 그 불은 광채가 있고 그 가운데서는 번개가 나며 그 생물의 왕래가 번개 같이 빠르더라 내가 그 생물을 본즉 그 생물 곁 땅 위에 바퀴가 있는데 그 네 얼굴을 따라 하나씩 있고 그 바퀴의 형상과 그 구조는 넷이 한결 같은데 황옥 같고 그 형상과 구조는 바퀴 안에 바퀴가 있는 것 같으며 행할 때에는 사방으로 향한대로 돌이키지 않고 행하며 그 둘레는 높고 무서우며 그 네 둘레로 돌아가면서 눈이 가득하며 생물이 행할 때에 바퀴도 그 곁에서 행하고 생물이 땅에서 들릴 때에 바퀴도 들려서 어디든지 신이 가려하면 생물도 신의 가려하는 곳으로 가고 바퀴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라 저들이 행하면 이들도 행하고 저들이 그치면 이들도 그치고 저들이 땅에서 들릴 때에는 이들도 그 곁에서 들리니 이는 생물의 신이 그 바퀴 가운데 있음이더라 그 생물의 머리 위에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펴 있어 보기에 심히 두려우며 그 궁창 밑에 생물들의 날개가 서로 향하여 펴 있는데 이 생물은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고 저 생물도 두 날개로 몸을 가리웠으며 생물들이 행할 때에 내가 그 날개 소리를 들은즉 많은 물 소리와도 같으며 전능자의 음성과도 같으며 떠드는 소리 곧 군대의 소리와도 같더니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서부터 음성이 나더라 그 생물이 설 때에 그 날개를 드리우더라 그 머리 위에 있는 궁창 위에 보좌의 형상이 있는데 그 모양이 남보석 같고 그 보좌의 형상 위에 한 형상이 있어 사람의 모양 같더라 내가 본즉 그 허리 이상의 모양은 단 쇠 같아서 그 속과 주위가 불 같고 그 허리 이하의 모양도 불 같아서 사면으로 광채가 나며 그 사면 광채의 모양은 비 오는날 구름에 있는 무지개 같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의 형상의 모양이라 내가 보고 곧 엎드리어 그 말씀하시는 자의 음성을 들으니라(겔 1:4-28)”
요한의 묘사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 내가 들은바 처음에 내게 말하던 나팔소리 같은 그 음성이 가로되 이리로 올라오라 이 후에 마땅히 될 일을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시더라 내가 곧 성령에 감동하였더니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 앉으신 이의 모양이 벽옥과 홍보석 같고 또 무지개가 있어 보좌에 둘렸는데 그 모양이 녹보석 같더라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 보좌로부터 번개와 음성과 뇌성이 나고 보좌 앞에 일곱 등불 켠것이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세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네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네 생물이 각각 여섯 날개가 있고 그 안과 주위에 눈이 가득하더라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 자라 하고 그 생물들이 영광과 존귀와 감사를 보좌에 앉으사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돌릴 때에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면류관을 보좌 앞에 던지며 가로되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계 4:1-11)”
에스겔과 요한은 모두 하늘의 보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보좌 주위의 모양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가 바로 우리가 가게 될 하늘나라의 하나님의 보좌의 모습입니다. 요한은 그 모습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과 같고...’ 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우리도 머지않아 눈을 감게 될 것이고, 또는 공중에서 주님을 만나게 되면, 요한이 본 것과 같은 아름다운 하늘나라를 보게 될 것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이 지나가시는 뒷모습만을 보았을 뿐인데, 그가 백성에게 내려왔을 때, 사람들은 모세가 너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존전에서 그 영광을 친히 목격하고, 영원토록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축복받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런 축복을 받은 우리이기에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추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또 하늘나라에는 보좌 위에 이십사 장로들은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면류관을 쓰고 앉아있습니다. 모세도 거기 있고, 엘리야도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곧 그곳에 거하게 될 것입니다. 계 3:11-12에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고, 계 7:15-16에서는 우리의 모든 슬픔과 눈물을 씻어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죽은 사람에게 ‘이제 편히 쉬라.’고 말하는데, 사실, 이는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쉼을 누릴 것입니다. 또한 그때부터 우리의 진정한 기쁨과 행복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의 슬픔을 빼앗아갑니까? 우리의 아버지가 하늘에 계시고, 날마다 그가 우리를 돌아보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며, 공급하시는데, 무슨 걱정과 슬픔이 있습니까? 세살 먹은 아이가 무엇을 먹고 살지를 고민한다면, 부모님은 아마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얘야, 그것은 니가 걱정할 일이 아니란다.” 주님께서는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약속하셨습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처소를 예비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걱정거리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기뻐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가진 사람들은 주위의 환경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하늘의 소망, 그것으로 인하여 기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직장에서 해고되었는데, 기뻐한다면, 미쳤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해고되었을지라도, 자신을 고려하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기뻐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실제로 준비되어있습니다. 가 본 사람이 있고, 거기에 있는 사람을 본 사람도 있습니다. 요한은 이 모든 것이 지어낸 것이 아니라, 보았고, 들었고,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사모하십니까? 위에 것을 바라보십시오. 그곳에 우리의 모든 소망과 기쁨과, 행복이 있습니다. 위를 바라보시며 사는 여러분이 되길 바랍니다.